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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26 12:31

무화과나무 아래 그를 묻다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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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 그를 묻다




30분 전 부터 나는 그의 삭은 나무등걸 같은 등을 긁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긁는 것이 아닌 그저 시늉에 그치는 짓을 하고 있다. 모로 누운 그는 인상을 구기며 계속 가려움을 호소했고 이상하게도 손만 갖다대면 아이처럼 온순해지는 것이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뜨듯한 바람 때문에 방안은 한증막처럼 후텁지근하다.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방안을 진동한다.
그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누워 있다. 이불은 발치에 둘둘 말려져 있다. 진통제의 약 기운이 사라질 때면 그는 이렇게 가려움과 답답함을 호소한다. 내가 모른 체 하면 어디에서 힘이 솟는 지 무시무시한 완력으로 내 손목을 잡고 긁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살갗에서 허연 비듬같은 것이 일어난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방인데도 이 것이 먼지와 뒤섞여 바닥에 뒹구는 것이 보인다. 그는 말라비틀어진 손으로 사타구니를 긁어댄다. 반사적으로 나는 침을 모은다. 이빨을 악다물며 입 안 가득 침을 모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문을 열고 나가 하수구 앞으로 달려간다.
마당가에 있는 하수구에서는 악취가 솟구친다. 파손된 채 노출되어있는 하수구는 불결하기 짝이 없다. 나는 입을 오므려 침을 멀리 뱉는다. 그러나 침은 멀리 나가지 못하고 겨우 하수구 입구쯤 고인 채 썩어가고 있는 오물 위에 얹힌다. 욕지기가 나며 나는 다시 침을 모아 뱉는다.
여름 한낮 너른 마당은 적요하다. 하수구 옆 야트막한 둔덕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무화과나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열매는 남자의 음낭 형상을 띤 채 달려있다. 이 볼썽사납게 생긴 열매는 푸른 물이 오를 대로 올라있다. 열매를 따서 손톱으로 누르니 허연 액체가 자상(刺傷)사이로 흐르는 피처럼 흘러내린다.
나는 이 무화과나무의 존재를 지난 가을에서야 알게 되었다. 불그죽죽한 녹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그 열매는 하수구의 고여있는 물 위에 꽂혀 있었다. 몇 달만에 찾아온 시누이는 나무 이름을 궁금해하자 마치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심지도 않았는데 저 나무가 갑자기 생겼어. 꽃도 피지 않고 바로 열매가 맺더라고. 아버진 '죽은 네 어미가 죽어서도 나를 감시하기 위해 환생한 거다'라고 말했지만 그건 말도 안 돼. 왜냐하면 엄만 한번도 아버질 원망하거나 시샘한 적이 없었거든. 그렇게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어도 말이지. 엄만 체념이 무척 빠르신 편이었지. 지금 아버지 처지를 생각하면 엄만 참으로 행복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거라고 할 수 있지. 물론 올케한테는 안된 일이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엄마의 환생을 믿었는 지 나무를 베어내지 않았지"
시누이는 붉은 오줌을 쏟은 그의 요강을 바로 이 하수구에 부셨다. 붉은 오줌이 닿을 까봐 나는 얼른 물에 젖은 열매를 끄집어 올렸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지. 꽃도 피우지 않으니 볼 것도 없고 열매도 어디 쓸데가 있을까" 이리저리 땅에 꽂힌 채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열매는 시누이의 말대로 흉물스러웠다.
나는 수돗가에 가서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는 누운 채 청포묵 같은 눈으로 나를 빤히 들여다본다. 어느새 이불을 당겨 왔는 지 허리춤에 이불이 말린 채 있다.
나는 텔레비전을 켠다. 흑인여자와 백인여자가 한창 테니스 시합을 벌이고 있다. 똑같이 머리를 뒤로 묶은 두 여자는 온 힘을 다해 공을 주고받고 있다. 공 처럼 솟구쳐 오르는 두 여자의 탄력적인 몸매는 인간의 완벽한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뛰거나 솟구칠 것, 땀 흘릴 것, 그리고 탄성을 지를 것 이것이 인간의 덕목이라는 것을 일깨우기라도 하듯 그들은 열정적이다.
갑자기 그가 몸을 뒤척인다. 그 서슬에 허리에 말려있던 이불이 들춰진다. 마른 수세미 같은 성기가 정면으로 보인다. 나는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는 수치심을 잊은 지 오래다. 타인의 성기를 보는 팍팍한 서글픔 같은 것이 일순 밀려든다. 나는 무력하게 누워있는 그의 앙상한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결국 흑인여자선수가 우승을 거둔다. 구리빛의 야생마 같은 그녀는 공중을 튀어 오르며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를 지른다. 그는 끙하는 신음을 흘리며 돌아눕는다. 엉덩이 바로 위에 생긴 욕창의 고통 때문이다. 나는 다시 그의 등에 손을 갖다대며 긁기 시작한다. 손톱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또다시 비듬 같은 것이 피어오른다. 어느새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마당 한 쪽 옆에 세워져있는 차는 영구차를 연상시키듯 암울해 보인다. 남편이 프랑스로 떠나며 놔두고 간 차였다. 남편은 저 차를 사자마자 그와 나를 태우고 바닷가를 드라이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신을 할 수 있었던 그는 남편의 옆자리에 앉은 채 상체를 뒤로 돌려 나에게 말했다.
"저기 방파제 보이지? 저게 바로 내가 만든 것이다. 지금이야 세월이 좋아 기계의 힘으로 되지만 옛날에는 다 손으로 했지. 바닷물에 들어가 수십 분씩 숨을 쉬지 않고 돌을 쌓아올린다고 생각을 해봐라. 너희들은 엄두도 못 낼 거다. 밥 먹을 시간도 없어 물 속에서 선 채로 전복 따먹고 해삼도 먹고 했지. 이 바다에서 나는 전복의 반은 내가 먹었다고 봐야지.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한 것은 바로 그 때 먹은 전복의 힘이지. 너희들 날 너무 병자 취급하지 말아. 너희들 보다 더 잠수질 오래 할 자신 있다"
그는 고개를 완전히 내 쪽으로 돌려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듯 말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오던 중이었다.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아마 오래 못 버틸 겁니다. 이미 폐 양쪽이 다 망가졌는데요. 암 전이가 아주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서. 드시고 싶은 거 드시게 하세요. 별 다른 처방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남편의 찡그린 얼굴이 보였다. 차 속력을 늦추며 남편은 아이처럼 자신의 치적을 뽐내는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말없이 앉아있는 뒷좌석의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3년 전이었다. 남편은 1년이 넘자마자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오래 사실 수 있을 거야' 남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나에게 주술을 걸 듯 말했다. 실지로 마치 의사의 진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이미 1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망설이는 남편을 향해 ' 너 오기 전까지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 걱정말고 다녀와'라며 호기를 부렸다. 남편은 프랑스로 향했다. 그는 남편이 떠나기 전 모든 재산을 남편 앞으로 상속했다. 공항에서 남편은 정말로 자유로워 보였다. 애써 미안한 마음을 짓기도 힘들었던 지 형량을 채우고 나가는 죄수처럼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차는 바닷바람에 칠이 많이 벗겨졌다. 허연 먼지와 새가 갈긴 똥으로 지저분하다. 차바퀴엔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며칠 전날 밤, 산 고개를 돌다가 고양이를 친 흔적이었다. 고양이는 미친 듯 질주하는 내 차를 피하지 못했다. 나 또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브레이크를 뒤늦게 밟았고 차는 타이어 타는 냄새를 피우며 한참 동안 미끄러져서야 멈추어 섰다. 차문을 열고 내려가 보니 도로에 고양이의 쓰러진 모습이 보였다. 차바퀴는 정확히 고양이의 몸통을 밟고 지나가 터진 뱃가죽 사이로 내장이 허물어지며 밖으로 흘러나왔다. 절단이 난 심장에서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차 뒤편으로 멀리 희미하게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차를 움직여 그 자리를 떠났다. 뒷 차에 의해 고양이의 시체는 두부처럼 터지고 으깨질 것이다. 야생의 들고양이는 결국 도로 위에서 달리는 기계에 의해 비참하게 생을 마치게 된 셈이다. 들고양이는 절대 모험을 해서는 안되었던 것일까.
도로로 나있는 대문으로 누군가 들어선다. 동네에서 하나밖에 없는 슈퍼마켓 주인여자이다. 여자는 노란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들어온다. 그 안에는 똥으로 칠감된 오리알이 들어있다. 여자는 그가 누워있는 방을 힐끔 쳐다보며 나에게 어색한 미소를 흘린다. 휴지를 사기 위해 언젠가 들렀을 때 여자는 '밤에 어딜 그렇게 다니냐'고 수상한 눈빛으로 캐물었다. 그리곤 뒤돌아서서 나오는 내 등을 향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긴 병에 효자가 어디 있겠어. 그것도 며느리가 혼자 병든 시아버지를 돌보는 게 어디 쉽겠어. 쯧쯧'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나에게 오리알이 든 플라스틱 바가지를 건넨다. "환자에게 이걸 삶아 먹이면 효과가 있을 거야. 오늘 새벽 우리 집 청둥오리가 낳은 알이야"
나는 그 여자의 말이 길어지게 될까봐 얼른 그것을 받는다. 여자는 마당을 한 번 둘러보며 '하수구를 고쳐야 할텐데 악취가 진동을 하네. 집 안에 남자가 없으니 ...쯧쯧' 하였다. 여자는 가지도 않고 계속 혀를 차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더니 마침내 못 기다리겠다는 듯 '한 알에 500원 쳐서 줘. 시장에 내가면 훨씬 더 비싸지'라고 말한다. 나는 그제서야 여자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방안으로 들어가 돈을 꺼내온다. 그는 여전히 약기운에 취해 잠들어 있다. 여자는 지폐를 받아들고는 '얼굴이 많이 상했네. 하루빨리 저 양반이 돌아가야 할텐데'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나간다.
나는 똥냄새가 진동하는 바가지를 수돗가에 내려놓고 씻기 시작한다. 오리알은 좀처럼 잘 씻겨지지가 않는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씻는다. 따가운 햇볕이 목을 사정없이 찌른다. . 알은 조금씩 하얗게 제 색깔을 찾기 시작한다. 나는 포장마차를 하는 그녀에게 줄 요량으로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담아 냉장고에 넣는다.
냉장고에선 여전히 여러 종류의 죽과 전복, 당근즙이 서서히 부패하고 있는 중이다. 이미 표면엔 하얀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계속 방치하고 있다. 썩어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두고 볼 참이었다. 마치 임상실험을 하는 연구자처럼 나는 썩어가고 있는 것들 앞에서 진지하다. 부패된 소고기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관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그를 상상한다. 아마 염을 할 때 입 속에 넣는 몇 톨의 쌀알과 함께 입이 가장 먼저 썩게 될 것이다. 청포묵 같은 눈동자와 이미 제 할 일을 다 마친 코와 긴 긴 세월 동안 사느라 지친 몸통과 수컷으로서 역할을 마친 성기, 그리고 마지막까지 생을 연명하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도록 조종한 비굴한 대갈통까지 서서히 썩어갈 것이다. 이미 썩기 시작하고 있었던 몇 개 남지 않았던 이빨까지 인간의 형체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가 썩지 않는다면 난 그를 애초에 포기했을 것이다. 싸질러 놓은 똥과 질질 흘리는 오줌과 하루에도 몇 번씩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종국에는 썩어 문드러질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갑자기 맹렬한 식욕이 일어난다. 나는 밥 대신에 잔뜩 사놓은 컵라면의 용기를 뜯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부패하지 않기 위해 방부제를 뿌리듯 나는 위 속으로 방부제를 쏟아 붓는다. 그리고는 채 퍼지기도 전에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이빨이 뭉긋하게 빠지는 느낌이 들어 먹다말고 부엌에 걸려 있는 작은 거울에 입 속을 비춰본다. 잇몸이 붉게 솟아올라있다. 윗니 어딘가는 썩고있는 것이 분명할 정도로 거뭇하다.
라면을 먹고 난 뒤 방안으로 들어간다. 조금 전 피워 놓은 향은 재가 되어있다. 향냄새는 병자의 체취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나는 다시 향을 피운다. 그의 얼굴엔 땀방울이 솟아있다. 나는 휴지로 그의 얼굴을 닦아내고 그의 아랫도리에 채워놓은 기저귀를 풀어본다. 그의 똥은 이제 콜타르처럼 검고 진득하다. 나는 기저귀를 끌러내고 그의 항문을 물수건으로 닦아낸 뒤 파우더를 치고 다시 새 기저귀를 채운다. 욕창이 생긴 부분엔 약을 바르고 거즈를 댄다. 그리고 똥 묻은 기저귀를 밖으로 내던지고 나는 그의 몸 위에 선풍기를 고정시킨다. 그는 말간 얼굴로 여전히 잠든 채로 있다. 나는 그 옆에 눕는다.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지기 위해 그 옆에 정부처럼 나란히 눕는다.


보건소 소장은 친절하다. 그리고 젊다. 보건소에 약을 타 올 때마다 나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젊은 보건소 소장의 팽팽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온다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차를 권하거나 선풍기를 앞으로 밀어줄 때 나는 감미로운 기분에 사로잡힌다.
몇 달 전인가 갑자기 의식을 잃은 그 때문에 병원에 도움을 청하자 병원에서는 이 곳 보건소를 연결해 주었다. 가망 없는 늙은 환자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주치의였던 의사는 "아직 그 환자가 살아있다는 겁니까? 허 참, 환자 보호자도 힘들지만 환자 본인에게도 고통스럽겠는데요. "라고 말하며 가까운 보건소에서 왕진을 가도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소장은 차를 몰고 이내 도착했다. 집에서 고작 10여분쯤 걸리는 곳이었다. 소장은 그의 동공을 살피고 응급조치를 하였다. 링게르 주사를 꽂고 난 뒤 주사바늘을 빼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치료를 마치고 나가던 소장은 내 머리칼에서 뭔가를 집어 올렸다. 그의 뭉쳐진 하얀 머리칼이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욕창 방지를 막는 시트가 필요할 것 같군요.. 욕창이 더이상 번지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번거롭게 이제 병원까지 일일이 가시지 마세요. 이런 시골도 의외로 좋은 점이 많습니다. "
이후로 나는 일주일 간격으로 보건소에 가서 약을 타왔다. 소장은 한 달에 한번 꼴로 링게르 주사를 주기 위해 집에 들렀다. 최근엔 링게르 주사제를 투여하는 것이 환자의 고통을 오히려 더 가중시키는 지도 모르겠다며 한숨을 짓는 일도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환자군요'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를 너무나 동정한 나머지 어쩌면 극약을 처방해 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소장은 한가한 진료실 내부를 계면쩍어 하며 '요즘 한창 외지인들 민박 받는다 해서 촌사람들이 아플 틈도 없나 봅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대답 대신 소장 바로 뒤에 나있는 창문을 통해 넘실거리는 바다를 보고 있다.
보건소는 산 중턱에 자리해 있어 아래로 긴 해안선을 볼 수가 있다. 파라솔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다. 마치 달력 속에 나오는 먼 이국의 풍경사진을 보는 것 같다. 소장은 내가 바깥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의자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본다. 소장의 머릿결은 억세지만 검고 건강하게 보인다. 불현듯 나는 그의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나는 무릎 위에 포개져 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소장과 나와의 거리는 불과 일 미터도 되지 않는다. 꼭 책상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을 뿐이다. 소장은 다시 고개를 돌려 상기된 표정으로 "해마다 피서철엔 여기서 구경만 하다가 다 보냅니다. 마누라와 아이들이 없으니 혼자 가기도 뭣하고...아, 예 저기 나를 빼고 가족들은 시내에 살고 있거든요." 소장의 얼굴에 쓸쓸함이 묻어있다. 나는 아이라는 말에 가슴이 쓰려옴을 느낀다. 아이, 조그맣고 새하얀, 아무 쓸모도 없을 정도로 나약한 아이.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까지 배웅해 준다. 나는 소장의 탐스런 머리칼을 쳐다보며 밖으로 나온다.
뜨거운 태양빛을 그대로 받은 차는 달아오른 용광로의 쇠 같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들어갈 생각도 못한 채 엉거주춤 밖에 그대로 서 있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보건소 건물의 창문을 통해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진료실 창문 너머에 소장은 정물처럼 서 있다. 나는 서둘러 차안으로 들어와 시동을 걸고 주차장에서 나온다. 열려진 창문으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운전대를 한 손에 그냥 잡은 채 상의를 벗는다. 손을 바꿔가며 벗느라 차가 비틀대다 하마터면 마주 오는 차를 받을 뻔 한다.
이 한낮 뜨거운 길 위에서 저 차와 내 차가 정면충돌을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나의 머리통은 오렌지처럼 터져 길 위에 소스처럼 뿌려질 것이고 나의 내장은 순대처럼 뿌연 김을 내며 아무렇게나 구불거릴 것이다. 뼈는 살인적인 햇볕에 더욱 하얗게 표백될 것이다. 야광의 뼈가 되어 밤이면 고양이의 눈처럼 살기를 띨 것이다.
그러나 이제 차는 다리 위에서 속력을 낮추며 지나간다. 그녀의 포장마차를 볼 수 있을까 해서이다. 그녀는 땀을 연신 목에 두른 수건으로 훔치며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그녀의 남편이 널브러져 자고 있다. 발치에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고 또 바로 옆에 거대한 쓰레기장이 있다. 멀리서도 나는 그녀 남편의 몸 위로 수많은 파리떼가 굼실대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나는 포장마차 앞에 차를 세우고 청둥오리 알이 든 바구니를 그녀에게 건넨다.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파느라 정신이 없는 그녀는 바구니를 받은 채 어색한 미소만 흘린다. 나는 음료수를 내미는 그녀의 손을 마다하고 차에 올라탄다.
어느새 색 바랜 지붕이 보인다. 화려한 외장을 한 주위의 집들과 달리 그의 집은 한눈에 봐도 퇴락 해 가는 집 같다. 도로 보다 낮은 ,푹 꺼진 집에 시체처럼 누워있을 그. 갑자기 집 전체가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썩어 가는, 구더기가 꼬이고 있는 하치장에 그의 몸이 가장 심하게 부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천천히 차를 마당으로 몬다.
열어놓은 방문 안 쪽에 그의 앙상한 발이 보인다. 나는 차에서 내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썩어가고 있는 노인을 향해 방으로 들어선다. 그는 아랫도리를 살피는 나의 기색에 눈을 뜬다. 나는 기저귀를 다시 갈고 선풍기를 아래로 향하게 고정시킨 뒤 향을 피운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포도 한 송이를 씻어 가져온다. 나는 포도 알 껍질을 벗긴 뒤 다시 씨를 발라낸 뒤 그의 동굴 같은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한 알의 포도 알을 삼키는데 무척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 때 전화벨이 울린다. 친정어머니는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돌아온 직후라고 , 며칠 전 여름캠프를 다녀왔는데 아빠, 엄마가 없어도 아이가 씩씩하게 잘 다녀왔다고 ,몸살기운이 있어 오늘 아침 병원에 데려갔다가 유치원에 보냈다고,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말한다. 전화 한 번 먼저 하지 않는 비정한 딸에 대한 섭섭함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이다. 외손녀로 인해 다시 인생을 사는 것 같다고 ,너를 교문까지 데려다 줄 때의 기분을 지금 다시 맛본다고 ,이런 기회를 준 너의 시아버지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봐, 이렇게 말하고는 민망한 지 '정 힘들면 시누이와 이제 교대해라. 저희들은 뭐 자식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전화선을 타고 단호한 목소리가 흐른다.
세 명의 시누이들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는다. 그가 전답과 산은 물론 두 채의 집까지 남편에게 넘기고 난 뒤 얼굴 가득 섭섭함과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 그네들은 다시는 이 곳을 오지 않는다. 시누이들은 땅을 물려받지 못해 앞으로 너무 행복하거나 너무 불행할 지도 모른다.
"잠깐이라도 여기 한 번 다녀가면 안되겠니? 애가 엄마 얼굴 잊어버리겠다"
"못 가"
나는 짧게 단호하게 말한다.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작은 얼굴, 작은 키, 눈물이 그렁한 채 온몸으로 매달려 오는 딸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지독한 년"
친정어머니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나는 다시 그에게로 돌아온다. 포도 알을 밀어 넣으려고 하는데 그가 입술을 오므리더니 나의 얼굴을 향해 포도 씨를 내뱉는다. 얼결에 당한 일이라 나는 망연자실 그저 앉아있기만 할 수밖에 없다. 그는 내가 전화를 받고 있는 동안 허기를 참을 수가 없어 말라비틀어진 팔을 들어 접시에 놓인 포도 알을 당겨와 입 속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나는 얼굴에 붙어있는 포도 씨를 떼어내며 그의 얼굴을 뚫어질 듯 쳐다본다. 그가 생에 대한 욕망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나에 의해 방기되는, 실험되는 것을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뜻이다. 썩어가야 할 것은 바로 '너, 못된 며느리라는 년'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지도 모른다. 나는 비로소 그가 사람이며 수컷이라는 사실에 눈을 뜬다. '그럼,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어. 나에게 시체 취급당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나에게 온몸으로 저항해야 할 거야. 나에게 동정심을 바라지 말고 너의 자존심을 지켜'
나는 그의 입 속으로 연신 포도 알을 밀어 넣는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향해 포도 씨를 내뱉는 그를 즐거운 듯 바라본다. 그의 가쁜 호흡이 느껴진다. 일순 방문으로 습한 바닷바람이 밀려들어온다.


남편은 여전히 집에 없다. 룸메이트였던 외국인도 이제는 없는 지 전화를 할 때마다 메시지를 남기라는 이국적인 멘트가 나올 뿐이다. 가끔씩은 외국인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하였다. 윤기가 흐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을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지금 이 시간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시차를 감안하여 밤 시간에 전화를 걸었는데도 없다. 이주일 전 인가 남편은 지쳐있는 나를 위로할 셈이었던 지 "여긴 얼마나 미친 여자들이 많이 있는 지 몰라. 글쎄 내가 공원에 산책을 갔는데 이 곳 불란서여자가 날 유혹하는 거야. 얇은 긴 코트 안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자신의 집으로 같이 가자고 말하는 거야. 여기 여자들은 동양인 남자들에 대한 환상이 많지. 아, 물론 난 당신이 생각나 따라가지 않았지. 지금 그럴 시간도 없어. 하루빨리 이 박사과정이 끝나고 나면 당신에게로 돌아갈 거야. 아, 참 아버진 여전하시지? 내 말이 맞다니까. 아버진 그렇게 쉽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라니까"라고 말했었다.
그는 조금 전부터 내내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잠도 자지 않고 있다. 미음을 평소 보다 많이 먹은 뒤, 그는 내가 밤 외출을 할까봐 감시하듯 계속 나와 텔레비전을 번갈아 보곤 한다. 텔레비전에서는 기상뉴스가 한창이다. 열대야 현상을 막아줄 비구름이 중국을 거쳐 내일 우리나라에 상륙할 것이며 높은 파도와 강우량으로 인해 피해가 예상된다는 일기예보이다. 여전히 선풍기는 끼익 소리를 내며 힘겹게 돌아가고 있다. 나는 그의 용변을 처리하고 선풍기를 회전시킨 뒤 외출할 준비를 하였다.
그의 머리맡에 자리끼를 두고 나오려고 하자 갑자기 그가 나의 손목을 잡는다. 축축하고 비루먹은 개의 혓바닥 같은 촉감이 싫어 그의 손을 내치려고 하자 의외로 그는 완강하다. 그는 다리를 가리키며 주무르라는 신호를 한다. 혈액순환이 안 돼 얼음 같은 그의 마른 다리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놓여있다. 나는 그의 다리에 손을 갖다대고 주무르기 시작한다. 한 손에도 그의 허벅지가 다 들어올 만큼 그의 몸은 볼품없다. 몇 분이 지났을까 나의 이마에 땀방울이 솟기 시작한다. 그는 입을 벌린 채 여전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그의 열려진 입 속에 썩어 누런 이빨이 들뜬 채 아무렇게나 박혀있다. 이제 이빨이 몇 개 남지 않았다. 스르르 허물어지듯 빠진 그의 이빨은 모래처럼 저절로 부스러졌다.
그는 오늘 밤 좀처럼 잠이 들지 않는다. 진통제의 약효가 이제 다한 듯, 아니면 그에게 내성이 생긴 것인지 별 효험이 없다. 나는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이제 더 이상 그 옆에서 수면제에 취해 잠들기가 싫다. 나는 그의 머리맡에 다가간다. 그리곤 내 가방 안에 들어있던 수면제를 꺼내 숟가락 위에 놓고 녹인 뒤 그의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거부한다. 서슬에 숟가락을 놓치고 바닥에 약이 엎질러진다. 내가 다시 약 한 알을 입 속으로 넣자 그는 내 손가락을 깨문다. 앗,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나는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내려친다. 그러자 그 또한 두 손으로 내 젖가슴을 움켜진다. 그의 완력은 대단하여 젖가슴은 얼얼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다시 한번 내려치고 머리를 두 손으로 들고 땅바닥에 두세 번 내려 찧는다. 그제서야 그는 젖가슴을 움켜잡은 손을 놓는다. 나는 그의 입을 벌려 남은 수면제를 송두리째 밀어 넣는다. 일순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 듯 보인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문을 닫고 나온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대문을 부수기라도 할 듯 무섭게 차를 몰고 도로를 향해 질주한다. 그의 젖은 눈자위가 떠올라 나는 더욱 광폭해진다. 성난 야수처럼 중앙선을 넘어 차를 몬다. 차는 고삐를 잃은 말처럼 갈기를 휘날리며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간다. 길은 거대한 콘베어벨트처럼 빠르게 돌아간다. 마주 오는 차가 속도를 늦추며 경적을 마구 울려댄다. 길 오른편으로 허연 거품을 뿜고있는 바다가 넘실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차를 바다 쪽으로 몰아야겠다는 강렬한 유혹에 사로잡힌다.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조금만 꺾으면 나는 수 십 미터 낭떠러지 아래 저토록 분노하고 있는 바다에 합류할 수가 있다. 내 몸은 떨어지자마자 공중분해 되어 거품 속에 녹아져 내릴 것이다. 흔적도 없이 나는 이 세상에서, 이 지옥에서 사라질 수가 있다. 나는 홱 운전대를 돌린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차가 앞으로 벌컥 솟구치면서 정지한다.


나는 차를 공중화장실 앞에 세우고 포장마차로 다가간다. 그녀는 앉아서 꾸벅 졸고 있다가 차 소리에 놀라 깼는 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쳐다본다. 그녀의 모습이 가까이 있는데도 멀리 있는 것처럼 아른거린다. 그녀는 포장마차 앞으로 뛰어나온다.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하여 포장마차 뒤 평상 위에 앉힌다. 불빛 아래 그녀의 놀란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말수가 적은 그녀는 여전히 말을 아낀 채 물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고 유심히 나를 살필 뿐이다. 만약 그녀가 수선스럽게 비명이나 지르며 야단을 치면 아마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아예 돌아서 버릴 것이다. 피가 물수건에 묻어있다. 이마를 다친 모양이다. 물수건이 닿은 자리마다 쓰라리다. 그녀는 사이다를 컵에 부어 건넨다. 나는 새삼스레 그녀의 두툼한 손등과 목 주름, 웃는 듯 비웃는 듯한 표정을 쳐다본다.
매일 밤 그에게 수면제를 먹이고난 뒤 미친 듯 밤바다를 헤매고 있는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던 그녀였다. 포장마차를 진 달팽이 같은 그녀는 느릿한 목소리로 그저 뭘 먹을 거냐고 묻곤 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보이지 않는다. 매일 밤 그녀의 포장마차 주변을 맴돌며 소주 한 병을 달라고 떼쓰다가 그녀가 던져주는 소주를 받아들고 나발을 불다가 아무 곳에나 누워버리는 알콜중독자 남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자 그녀는 '정신병원에 가 있어' 라고 짤막하게 말한다. 나는 그녀의 표정이 다른 때 보다 더 어둡고 가라앉아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녀는 연신 배에 손을 갖다대며 쓸어댄다. 나는 그녀의 눈가와 광대뼈가 있는 뺨에 기미가 끼어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갖다대자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친다.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찌푸린다.
" 수술이 잘못 되었는 지 계속 이렇게 아프네. 하혈도 하고..."
나는 그녀의 눈을 노려본다.
"남편과 잤단 말이야? 이런 형편인데도 참 어이가 없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마음은 안통해도 몸은 통하는 것이 남편이란 작자거든"
나는 어이가 없어 한참을 그녀의 얼굴만 쳐다본다. 까칠한 얼굴의 그녀는 말수가 많아졌다. 고통을 참느라 술을 마신 게 분명하다.
"아픈데 이렇게 나와 있으면 어떻게 해. 병원에 나와 가보자"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내 몸은 내가 알아. 피곤하면 잘 이래... 오늘 꽤 매상을 올렸거든. 주정뱅이 남편이 없으니 손님이 배로 늘었어. 병원비라도 댈려면 아플 시간도 없는데 "
"바보 같은 소리 마. 고집 피우지 말고 병원에 가보자"
"싫다. 이런 말 들을 것 같으면 너에게 말하지도 않았어"
그녀는 내 말을 완강하게 잘라버린다. 그리곤 진열대 위에 놓인 물건을정리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를 도와 야채와 식품 등을 상자에 담고 포장마차를 비닐로 덮고는 묶는다. 나는 그녀를 차에 태운다. 매일 새벽 혼자 30분이나 넘는 거리를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편을 부축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그녀였다. 내가 태워준다고 해도 극구 사양하던 그녀였다. 걷다보면 술주정뱅이 남편은 술을 다 깨고 그러면 신기할 정도로 순한 양이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 옆에 얌전히 앉아있다. 차 앞이 심하게 일그러진 것을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을 뿐 몸을 의자에 깊이 기댄 채 물끄러미 밤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저 바다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야. 남편을 버려놓은 바다이지만 난 저 바다 때문 에 사는 거야"
어부였던 남편은 바다 한가운데서 바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며 술을 통째로 들이붓곤 하였다고 말한다.
"난 아무도 원망 안 해. 남편도 저 바다도. 교통사고로 먼저 간 아들도"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있는 사막의 모래알갱이가 나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다니고 있는 느낌이 든다. 뇌를 헤집고 다니는 모래알갱이로 인해 머릿속이 피로 가득 찬 듯한 아찔한 느낌이 든다.
"너무 힘들지? 이 세월이 너무 힘들지? 그럼 너도 나처럼 저 바다를 위안 삼는 거야"
그녀는 집 앞에서 이 말을 편지 쓰듯 또박 말한다. 불이 꺼진 집으로 그녀는 들어간다. 나는 한참을 차 안에 있다. 그녀와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녀는 허물어진 남편과 몸을 섞으며 희망을 갖는다. 그녀에겐 희망이 있고 나에겐 희망이 없다. 이 간단한 차이가 나를 서럽게 만든다. 그녀는 살아있고 나는 이미 죽은 것일 지도 모른다. 갑자기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것이다.
나는 서둘러 차를 돌린다. 빨라진 내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 차의 엔진음 또한 가열차다. 이내 오른쪽으로 보건소 건물이 보인다. 1층 진료실엔 불이 꺼져있다. 보건소 건물 바로 뒷편이 바로 사택이다. 나는 사택 쪽으로 올라간다. 길 모퉁이에 소장의 차가 가로등 아래 서있다. 나는 소장 차 옆에 내 차를 세운다. 공중에 있던 하루살이가 차 유리창에 와 스스로 부딪친다. 허옇게 하루살이의 시체가 유리 표면에 들어붙는다.
산중턱이어서 그런지 바람이 간간이 불어와 선선하다. 이십 여 가구가 채 되지 않는 동네이어서 여기 있다간 바로 소문이 날 지도 모른다. "시아버지 병 수발 하고 있는 그 여자 결국 바람이 났어. 그것도 보건소 소장과 말이야" 소문은 나를 빼놓은 채 한동안 떠돌다가 제풀에 사그라질 것이다. 이곳은 휴양지로서 이미 마을사람들은 해괴한 소문에 많이 익숙해진 터였다. 바닷가 텐트 안에서 엉겨 붙어 자고 있는 남녀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콘돔과 여자 속옷들, 이따금 기구한 사연으로 팅팅 불어터진 채 떠내려 온 이름불명의 시체들로 인해 마을사람들은 웬만한 일로 난리법석을 피우지 않는다. 불륜은 이 동네사람에겐 일상이 되어있을 지도 모른다. 다만 끈질긴 효사상만 남아 방파제를 만든 그의 고달픈 인생에 대한 연민만이 오래도록 남아있을 지 모른다.
차를 돌려 나오려다가 나는 몇 번 보건소에서 부딪친 적이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민박을 친다는 여자는 옆구리에 음료수와 술병을 끼고 있다. 아마 바닷가에서 광란의 밤을 보내고 있을 손님들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 주는 중인가 보았다. 그 여자는 이마에 찰과상을 입은 날 유심히 바라보다가 화급히 소장이 묵고있는 사택으로 들어간다. 소장은 이내 밖으로 나왔다. 소장의 손엔 이미 왕진가방이 들려져 있다. 내가 뭐라 말도 하기 전에 그는 내 차 옆 좌석에 올라앉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차를 몰 밖에 없다. 언덕을 다 내려올 즈음 소장은 운전대에 올려진 내 오른손을 잡는다. 아마 소장은 그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하듯 나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소장의 느낌대로 그는 죽어 있을 지도 모른다. 머리를 그렇게 찧었으니, 수면제를 한 웅큼이나 먹였으니 어쩌면 그는 죽어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집으로 가는 방향과 정반대로 차를 몬다. 소장은 내 손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앞으로만 몬다. 소장은 뭐라 말하려다 말고 나처럼 물끄러미 앞을 보고 있다.
여전히 바닷가 해안도로는 차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얇고 짧은 옷을 입고 아무데서나 무단횡단 하고 있다. 차가 지나가도 빨리 지나갈 생각을 않고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지르는 소리와 음악소리가 낯선 세계에 와 있는 착각을 준다. 나는 인적이 드문 해안도로 끝까지 달린다. 저 멀리 등대의 희미한 불빛이 깜박이고 있다. 나는 어느 모텔 앞에 차를 세운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본다.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다. 나는 내 몸을 사달라고 애원하는 창녀처럼 매달린다. 그는 말을 듣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고 그냥 앉아있을 뿐 내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는 할 수 없이 차를 돌린다. 불통인 전화기를 들고 있는 느낌이다. 소장은 얕은 한숨을 내쉰다. 나는 보건소 있는 곳으로 차를 돌린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만약 자고 나면 난 당신에 대해, 우리의 관계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될 거고...아마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도 못할 것 같아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댄다.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이런 관계일지도 모른다. 관계를 맺지 못해 안달이다가 막상 관계를 맺을 기회가 다가오면 죽음처럼 두려워한다.
보건소가 보인다. 조금 전 도로에 나와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한여름밤 중 가장 깊숙한 시간에 소장과 나는 결별하는 연인처럼 머뭇거리며 차안에 있다. 갑자기 소장이 내 쪽을 향해 소리친다.
"조금 전 그 곳으로 다시 갑시다. 내가 생각을 잘못 했어"
이번엔 내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볼 차례이다. 소장은 정염에 가득 찬 눈길로 내 눈을 노려보고 있다. 나는 소장의 무릎에 놓여있는 왕진가방을 나꿔채 창 밖으로 내던진다.
"내려요. 어서"
소장은 기가 찬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다. 나도 그에 질 새라 노려본다.
"빨리 내려 이 개새끼야"
소장은 이제 안색이 창백해진다. 소장은 누가 볼 새라 허둥대며 얼른 차에서 내린다. 나는 소장이 차 문을 닫자마자 가속페달을 밟는다. 차가 탄환처럼 앞으로 튕기듯 나아간다. 그러나 차의 난폭함과는 달리 다시 소장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소장과 격렬한 정사를 벌이고 싶다. 더럽고 축축한 침대 위에서 정갈한 소장의 손아귀에 기꺼이 젖가슴을 내맡긴 채 한껏 애욕의 교성을 지르고 싶다.
난 정말이지 썩고싶지 않다. 소장과 몸을 섞어서라도 삶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썩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 싶다. 나는 온몸에서 악취가 나는 것 같은 착각에 젖는다. 비리면서도 구역질 날 것 같은 더러운 냄새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다. 내 몸은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한다.


그는 여전히 죽지 않은 채 있다. 이마를 타고 내린 땀이 짓무른 눈가와 콧잔등에까지 촛농처럼 흐르고 있다. 그의 입가엔 침과 함께 뒤섞여 버린 허연 약 알갱이가 버짐처럼 붙어있다. 수면제를 필사적으로 뱉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적어도 타인에 의해 죽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일 것이다. 이 사실을 매번 확인할 때마다 그가 진저리치게 혐오스럽다.
그의 손엔 지폐가 한 다발 들려져 있고 방바닥 여기저기에도 지폐가 몇 장씩 떨어져 있다. 나는 장판을 들춘다. 습기로 검게 썩어가고 있는 장판 밑에 꽤 많은 지폐가 숨겨져 있다.
그는 내가 장판 아래에서 돈을 꺼내는 것을 보더니 "가" "가"라고 되뇌인다. 그리고 남편의 이름을 희미하게 부른다. 이 돈으로 자신을 남편이 있는 곳으로 보내 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남편은 지금 다른 여자와 살고 있을 터이다. 십 년을 살아 온 부부로서 나는 직감적으로 남편이 외로움을 이겨낼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긴 절대로 갈 수 없어요. 너무 멀고...게다가 그 사람은 이미 아버님을 잊어버렸어요. 이제 아버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모두들 아버님과 제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을 거예요. "
사실일 것이다. 그가 살아있으면 있을수록 자식들은 자신에게 짐 지워져 있는 죄의식으로 인해 괴로워할 것이며 그 괴로움은 결국 그에게 비수로 꽂힐 것이다. 이미 남편과 시누이들은 그에게 비수를 꽂고 달아난 셈이며 그 피 묻은 비수를 씻느라 앞으로 내내 힘들 지도 모른다. 내가 없어져 주거나 그를 따라 죽기를 바랄 지도 모른다. 그들은 나에게 진 빚으로 인해 내내 채무자 입장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결국 타인을 살해하고 달아나는 운명을 지게 되어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는 입가로 침을 흘리며 "너 가"라로 두 번 말한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뜬 채 여전히 내 쪽을 응시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의 얼굴엔 죽어 가는 사자의 음산한 귀기가 서려있다. 그가 나를 위해 무언가 마지막 힘을 쏟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하기 위해 그는 죽음을 자신의 의지로 늦추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머리맡에 버티고 서 있는 죽음의 저승사자와 치열한 싸움을 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무섭고 두려워 소리를 지른다.
"이제야 선심을 쓰겠다는 건가요? 이미 난 썩어가고 있는데...아버님이 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탓에 난 이렇게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렸는데... 지금 내 꼴이 어떤 지 아세요? 난 바람 피우는 남편을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어요. 또 아이를 엄마에게서 데려 오지도 못해요. 이제 너무 늦어 버렸어요 "
나는 적의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본다. 이제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사지를 비튼다. 나는 이빨을 악문다.
"아버님이 살려고 할 때마다 난 끔찍했어요. 이미 아버님은 죽었어야 하는 거 였다구요.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혼자만 떠나겠다구요? 그렇게는 안돼요. 그렇게 쉽게 아버님을 용서할 줄 알았어요? 아버님을 두고두고 괴롭힐 테야.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오래도록 즐길 거야."
나는 손거울을 가져다가 그의 얼굴 위를 비춘다. 이미 사지가 돌아갈 대로 돌아가면서도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다. 나는 우악스럽게 그의 목을 돌려 거울 앞에 고정시킨다. 그는 이미 사시가 되어있는 반쪽 눈동자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는 경련하기 시작한다. 나의 입술에선 피가 솟는 지 비린 냄새가 피어오른다.
"더 똑똑히 보세요. 이미 사람의 형상이 아니죠? 아버님은 죽어가고 있는 중 이라구요. 숨이 완전히 멈출 때 까지 나는 지켜 볼 거예요. 썩어가고 있는 자신을 한 번 보라구요. 자, 어서요, 눈을 뜨라구요"
이 때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내 손에 들려 있는 거울을 손으로 제친다. 거울은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이 난다. 여기저기 거울 조각이 나뒹군다. 그의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솟은 것일까? 생의 마지막 입김을 세상에 대고 불어보는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진다. 그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킨다. 열려진 문 사이로 검고 푸른 밤이 내려 앉은 마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무화과나무...묻어...무화과나무...묻어"
그는 무화과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어둠 때문에 무화과나무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벗겨진 몸 엉덩이에서 검은 똥이 비질 새어나왔다. 시꺼멓고 축축한 똥이 요를 검게 적신다.
나는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그를 바라본다. 그의 동공은 풀리고 입술은 파랗게 변한다. 몸은 얼음처럼 차갑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다. 나는 그의 차가운 이마에 입술을 댄다. 그는 눈을 완전히 감는다. 나는 그의 겨드랑이에 양 손을 집어넣어 일으켜 세운다. 벌컥 그의 입에서 오물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온다. 몸에선 진물 같은 것이 흐른다. 팽창된 그의 내장이 구멍이란 구멍 사이로 다 뿜어져 나올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그를 질질 끌면서 밖으로 내간다. 마루 끝에서 나는 그를 등에 업는다. 그의 몸은 가볍다. 더러운 하수구를 넘어 무화과나무 아래에 그를 눕힌다. 떨어진 무화과나무 열매가 그의 몸에 의해 으스러진다. 그는 무화과나무와 함께 썩어갈 것이다. 썩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경외감으로 나는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풍장되고 있는 그를 위해 가만히 나는 눈을 감는다. 후두둑 굵은 비가 쏟아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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