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환 선생님께서는 정해영 동인의 <옆>과 박수하 동인의 <누수>에 대한 비평을 들려주었습니다. 선생님의 비평의 축은 ‘공간과 사물, 시간’에 근거합니다. 이 세 축을 중심으로 하이디님의 시를 푸십니다.
평소에도 사유의 이미지나 시선의 깊이가 느껴지는 시를 주로 쓰시는 하이디님의 시 <옆>에 대해서...
‘옆’은 장소이자 사물이기도 하고 마음이기도 합니다. 한자로는 ‘측(側)’에 해당하는데, 사물에 대한 측심, 측은지심으로도 이 시를 읽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또한 ‘beside’의 개념으로 풀자면 ‘~~으로부터 벗어나’, 즉 시간과 장소의 예외적인 그곳에, 그래서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고픈 시에 해당한다는 말씀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꽃’이면 꽃이라는 ‘언어’로써 그 사물을 아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실제인가 하는 의문에서 실제를 생각해 볼 때, 그 사물은 무화되거나, 無가 되기도 합니다.(오메, 헷갈려~~!!^^)
게다가 정 시인조차 “가깝고도 먼 옆이 사라진다”라고 말해 시가 더욱 오묘해집니다.
‘사라진다’라는 것은 볼 수 없을 뿐 그 존재가 어디메 있을지도 모르기에.... “모란이 지고 있”다는 말이 ‘부재의 현존’으로 읽힌다고 합니당. ‘지다’라는 동사는 ‘스며들다’, ‘베어들다’. ‘스며나오다’ 등등으로 변주됩니다. 그래서 ‘모란’은 지상의 꽃이 아니라 이제는 ‘허공의 꽃’이 되고 맙니다. ㅎㅎㅎ.......... 허(虛)나 무(無)에 대한 말ᄊᆞᆷ이 어렵습니다.
‘공허’라는 개념도 그렇게 보자면 소위 <디지털 사진>이라는 것은 공허의 절정이라고 하십니다.(이정수 쌤도 듣고 계셨습니당.) 그래서 “인류는 사라짐을 발견한 유일한 종(種)”이라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보다’와 ‘듣다’가 혼효하는 시간, 우리가 혼절할까봐, 선생님께서는 백거이의 칠언절구 <모란이 지는 밤에,==석목단화(惜牧丹花)>를 읊어 주셨습니다. “슬프다, 섬돌 앞의 붉은 모란/ 저녁 사이(or 늦은 밤 돌아오니) 두 가지만 남았구나/ 내일 아침 바람 불면 그나마 지고 말 것을/ 지는 꽃 아쉬워 촛불 잡고 보노라(or 이 밤 불 밝히고 보노라)”
이건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당!!
박수하 동인의 <누수(漏水)>는 詩 쓰기에 대한 시인의 열정과 간절함, 사무침을 토로한 시로서.... 단순히 ‘물이 샌다’는 의미 이상이라고 합니다.
시인은 “절망이 누수처럼” ‘새어나온다’는 말 대신에 “스며 나온다”’라는 시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에 주안점을 찍은 김상환 쌤께서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나타프(nataph)는 ‘소합향’이란 뜻인데요, 즉 나무를 찌를 때 상처 난 곳에서 나오는 향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나타프’는 ‘물방울’에서 유래된 말로서, 성서적 의미로 보자면 ‘스며나온다’ 혹은 ‘예언하다’, (영감에 의해) ‘말하다’로까지 의미가 확장됩니다.
이것은 날카로운 창끝으로 찔러 한방에(단번에) 쓰러뜨리는 풍크툼(R.바르트의 용어, punctum)의 이미지와 통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누수>는 존재의 ‘이음’과 ‘승화’에 대한 시로 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김욱진 선생님께서는 이규석 동인의 <해후>와 고미현 회장님의 <주인, 돌아오다>를 감상하고 비평해 주셨습니다.
먼저 선생님께서는 <시작법>에 대해 포문을 여셨습니다. 詩는 곧 삶이자 일상이라는 말씀, ‘物像’과 ‘나’는 둘이 아니라는 말씀에 이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 실상이 없는 것인데 그 없음을 느낄 수 있도록 시를 깊이 있게 써야 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일상 속에서 보고 느끼는 것, 순간 순간을 깨어 있어야 하는 것, 또한 불가에서 말하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을 녹여낼 때 상상력, 생명력, 공감력이 있는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해후>는 삶과 죽음까지도 함께 얼키고 싶은 ‘형제애’라는 핏줄의 인연을 엮은 시. “수의도 못 얻어 입은 몸/ 흙 이끼 덮고/ 가시투성이 두릅나무”를 두르고 있는 주검이 하도 애통해서 형은 “양지바른 소나무 아래로 새 집 지어 옮”깁니다. 아우의 묘를 양지로 옮기고 나니 “아우는 나비처럼 날아” 오릅니다. 형과 아우이라는 이 핏줄의식은 이승과 저승을 아우르는 생명력으로 활짝 피어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고미현 동인의 <주인, 돌아오다>는 2학년 5반 담임 선생님이 코로나19 상황의 빈 교실을 안타깝게 지키던 배경을 갖고 있다고 보셨습니다. 철 늦은 개학날 아침에 주인(학우)들이 속속 학교로 복귀하는 모습이 ‘콩콩콩’, ‘푸릇푸릇’, ‘첨벙첨벙’ 등의 부사어와 맞물려 생동감을 자아내고 있다고 하십니다. 매일 만나는 우리네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시, 아울러 모든 독자들이 간직하고 있는 학교 운동장의 추억들, 유년의 풍경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 “백년 은행나무는 숨죽이며 서” 있는 그 자리는 바로 동심의 근원이자 놀이터였음을 일깨우는 시라고 하셨습니다.
장하빈 선생님께서는 전영숙 동인의 <봄볕에 탄 말>과 김학례 동인의 <절개>를 감상하시고 비평해 주셨습니다.
전영숙 동인은 올해 물빛 토론회에서 한 번도 시를 발표하지 않은 적이 없고, 평소 이력에서도 결석이 전무(全無)에 가깝고....
수작을 내는 아낙(?)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장하빈 선생님께서는 이 시에서 조선 중기 화가 윤두서의 <나물 캐는 여인>이라는 그림을 연상케 된다고 하셨습니다.
"봄-봄볕, 고사리 독(끊는다)-고사리 주먹(끊는 재미)-고사리밥(꺾어 담는다)"이라는 행위의 점층이 여인의 손놀림과 시인의 말놀림으로 기막히게 “대바구니에 철철 넘치도록” 담겨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춘기 시인은 <사람에 취하다 16>에서 부제를 <낙엽>이라고 붙이고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가을이 오면 함부로 낙엽을 밟지 마라// 여름 한 철 온몸으로 써내려간// 벌레들의 일대기가 적혀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어떤 사물(대상)도 다 존귀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봄철 고사리 캐는 아낙의 힘겨운 노동조차 재미있는 놀이문화로 바꾸어 놓고 있다고 하십니다. 전영숙 동인이 자연에서 보석을 캐는 연금술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유입니다.
김학례 님의 <절개>는 자신을 산화(散花)시켜 중생을 제도하는 詩로 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목이 되어서도 창가를 떠나지 않는 벚꽃나무는 곧 절개와 신의의 상징인 바, 시인의 성정이 투영된 성인군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하셨습니다.
타자를 향해 열린 가슴으로 오랜 세월을 인내한 고목의 벚꽃나무를 우리 마음에 한 그루씩 간직하고 싶어졌습니다.
11월 23일 화요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같은 물빛 출판기념회는 이제 밤 9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흰나리꽃 같은 동인님들 모습은 더욱 아름다워졌고, 사랑방 선생님들의 불타는 시혼과 교수님의 잔잔하신 열정은 사명을 완수하고 귀향하려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복귀하고 있었습니다.
ㅎㅎ 이정수 사진작가님의 건장한 사진 테크닉은 한 소음을 내지르시는 것으로 우리의 처진 눈꼬리가 올라가도록 기념사진을 찍어 주셨습니다.
송창식 가수의 노랫말처럼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하나로, 연인으로 자리했습니다. 이 행복을 빼앗기고 싶지 않지만 또 여럿이 공유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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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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