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없는 것들의 전언
딸의 방에서 박카스 상자를 발견했다. 무심코 열어본 순간 정말이지 얼어붙고 말았다. 어리디 어린 토끼와 나는 서로 놀라서 쳐다보았다. 주먹보다 작은 아기토끼는 나보다 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딸은 시치미를 뚝 떼고 학교를 오가며 내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방 밖으로는 나올 겨를이 없어 보였다. 엄마와 의논하면 반대할 것 같아서 혼자 용기를 낸 일이었겠다. 딸은 인터넷으로 건초를 주문하고 빈 박스 안에 사각 소쿠리를 엎어 토끼 보금자리를 꾸몄다. 내가 잔소리하기에는 너무 늦은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딸과 나는 한 편이 되어 그 어린 생명을 먹이고 돌봐야 했다. 난 지 며칠 만에 제 어미를 떠나 왔으니 그 불안을 어떻게 보듬어줘야 할까 잠이 오지 않았다. 워킹 맘인 내겐 또 다른 짐이었다.
딸이 토끼 이름을 지었다. 연한 밤톨 율. “율아!” 하고 부르면 귀를 쫑긋거렸다. 딸은 율이에게 정해진 곳에서 용변을 보도록 훈련시켰다. 배합사료 몇 알을 미끼로 건네며 칭찬요법을 쓰는 것 같았다. 율이의 훈육은 딸 담당이고 흩어진 건초 정리나 방 청소는 내 몫이었다. 출근하기 전에 들어가 살피고 퇴근 후에는 현관문에서 제일 먼저 율이를 부르곤 했다. 이제 딸의 방도 율이 방이라고 부르는 게 편했다.
율이는 잘 자라 주었다. 낮 동안 빈 집에서 가구를 갉고 침대 위 이불을 뜯고 책을 뜯고 벽지까지 뜯었다. 딸은 율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귀 사이를 쓰다듬으며 타일렀고 나는 딸에게 짜증을 냈다. 청년이 된 율이는 장난질이 심해서 방 문이 빼꼼히 열려 있으면 달려나와 거실과 베란다, 안방까지 놀이터의 영역을 넓히곤 했다. 거실 소파 밑에 들어간 율이를 제 방으로 보내려면 온 가족이 나서서 그야말로 토끼몰이를 해야 했다. 마치 강아지처럼 한 식구가 됐다. 하지만 그날그날이 숨가쁘던 나는 토끼의 생태를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할 일이 더 많아졌다고 투덜거리며 택배로 온 건초들만 먹이로 던져주었을 뿐. 정말로 어리석었다.
율이가 털갈이를 하는 철이 되었다. 방과 거실에는 토끼털이 풀풀 날아다녔다. 이불에도 수건에도 토끼털은 잘 빠지지 않았다. 특히 검은 옷에는 빨래를 해도 선명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율이를 내 앉은 다리 속에 가두고 찍찍이로 율이 몸을 훑어야 했다. 롤러에서 종이 뜯어내는 소리가 나면 율이는 재빨리 침대 밑에 숨곤 했다. 그러다 잡히면 체념한 듯 가만히 있었다.
율이는 또 물을 너무나 싫어했다. 하지만 여름철에는 털이 엉긴 녀석의 몸을 씻기고 싶었다. 샤워기 물소리에 기절초풍하던 녀석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자 오히려 내게 착 달라붙었다. 딸아이 어릴 때처럼 녀석의 몸에 물을 축여가며 “괜찮아, 괜찮아, 율아!” 하고 중얼거리며 씻겼다. 수건에 폭 싸서 드라이기를 약하게 틀어 몸을 말리면 눈 감은 채 순하게 귀를 접고 있었다. 그 말없는 순종의 자세가 나를 애틋하게 했다.
세월이 십 년 정도 흘렀다. 혼자 잘 놀던 율이가 건초를 뒤헝클고 뭔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동물병원에서 찍은 초음파 사진에는 장이 꽤 꼬여 있었다. 치료방법은 없고 아마도 서서히 장이 막힐 것이라고 수의사는 말했다. 얼마 후 딸은 구하기 어렵다는 직장을 구해서 집을 떠나게 됐다.
몇 해가 더 지나고 율이도 나도 많이 노쇠했다. 율이는 나보다 더 뼈가 가늘어지고 앞다리가 휘었다. 웃자란 베이지 색 털이 수염 같이 더부룩해 영락없는 할머니 토끼가 되었다. 두세 번 더 율이는 병원 진료를 받았다. 천천히 견뎌야 하는 세월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드디어 율이가 방안 아무 데서나 용변을 흘리고 침대 밑에 숨기를 자주 했다. 방안에는 토끼장 냄새가 배었다. 나 역시 직장일 때문에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나는 딸처럼 토끼를 타이르지 못했고 녀석의 귀 사이를 톡톡 때려주었다. 볼이 없는 토끼는 두 귀 사이가 사람의 미간처럼 평평했다. 착하다고 칭찬할 때 딸은 그곳을 쓰다듬었고 나는 토끼를 나무랄 때 손으로 거기를 톡톡 때렸다. 율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잘못일까. 한겨울 날,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율이는 세상을 떠났다. 휜 다리를 절룩거리며 방 밖으로 나오려고 했던 흔적을 보니 나를 찾으려고 한 것 같았다. 바닥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먹이통을 뒤집으면서 말이다. 내게 14년 동안을 눈빛으로만 말하던 율이, 식물처럼 입이 없던 율이의 마지막을 나는 못 보았다.
멀리 사는 딸에게 율이를 싸들고 갔다. 율이는 사금파리 같은 뼈 몇 알로 주인 품에 안겼다. 남은 것은 나의 후회였다. 상추잎이나 양배추, 당근 등의 채소를 율이에게 자주 먹이지 못했다는 것. 토끼풀을 뜯으러 들판에 나가기는 했지만 좋아하는 생 채소를 자주 먹일 생각은 별로 안 해 봤다. 정말 미안했다. 지금도 상추를 씻거나 당근을 깎을 때 율이를 생각한다. 떠난 지 3년이 됐어도 아련하다. 딸은 엄마를 떠나 집에 잘 오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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