찡긋 웃는다
정 해 영
기차 여행을 하다
이야기도 시들해 질 무렵
그와 내가 가방에서 꺼낸
우연히 표지가 같은 책
그는 앞부분을,
나는 절반 이상을 읽고 있다
나란히 앉아
그는 앞에 있고
나는 뒤에 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유희처럼 슬픔의
씨를 뿌리는 주인공의
젊은 날을 지나고 있고
그것이 불행의 열매로 무르익어
따지 않으면 안되는 노년
내가 지나가고 있다
그는 가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눈부시게 올려다 보고
나는 계속 아래를 보고
눈시울을 붉힌다
가끔씩 우린 마주보고
찡긋 웃는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시작과 결말이
인사를 한다
똬리를 튼 생의
머리와 꼬리가 슬쩍 스치는
순간이다
-애지문학회 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여행이란 새로운 곳과 낯선 곳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전통과 풍습을 배우고, 자기 자신의 삶을 보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향유하고 싶다는 소망에 기초한다. 제주도에 가서는 제주도의 전통과 풍습을 배우고, 동해바다에 가서는 동해바다의 전통과 풍습을 배운다. 호남평야에 가서는 호남평야의 전통과 풍습을 배우고, 서울에 가서는 대도시의 역사와 전통을 배운다. 독일에 가서는 독일민족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고, 로마에 가서는 로마제국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배운다는 것은 낡디 낡은 과거의 탈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말하며, 이 배움의 최고급의 형태가 여행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배낭여행, 기차여행, 도보여행, 자전거 여행, 선박여행, 유학여행, 이주여행 등,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인생 자체가 지구별로의 여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은 여행이고,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지구별 여행의 동승객일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곳,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가슴이 설레이는 사건이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여행들은 아름답고 행복한 삶으로 귀착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어디를 가도 자기 자신만을 떠메고 다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나 다같이 자기 자신의 행복의 연주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이것 역시도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삶이 대부분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우주 전체가 다 내것이고, 내가 사는 곳이 다 지상낙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세상의 힘든 삶과 그 비극적인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나는 나이고, 나는 보다 새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쯤이면 뱀의 머리와 꼬리가 맞닿아 있듯이, 누구나 똑같은 삶, 똑같은 한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정해영 시인의 [찡긋 웃는다]는 노부부의 기차여행을 주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젊은 날의 슬픔의 씨앗이 불행의 열매로 무르익어 그것을 따지 않으면 안 되는 비극적인 결말로 그 여행을 끝낸다. 젊은 날의 슬픔이 불행의 열매로 무르익었다는 것은 매우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방식은 전혀 진부하거나 상투적이지 않다. 매우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기법으로 엮어나가며 그 비극적인 결말을‘찡긋 웃는다’라는 또다른 주제(곁다리 주제)로 끝맺는다.‘찡긋 웃는다’는 것은 눈이나 코를 찡그리며 웃는 것을 말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불행한 인생 전체를 비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 불행한 삶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된다.
정해영 시인의 [찡긋 웃는다]는 두 개의 주제와 두 개의 이야기가 겹쳐지며, 기차여행, 아니, 인생여행 자체를 찡긋 웃는다로 보다 폭넓고 아름답게 감싸안는다. 어느날 노부부는 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위해 기차여행을 떠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이야기도 시들해질 무렵, 그와 내가 가방에서 꺼낸 우연히 표지가 같은 책을 꺼내 읽는다. 이 대목은, 혹시 그와 나는 부부가 아니라, 오랜 친구나 연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어쨌든 그는 앞부분을 읽기 시작했고, 나는 이미 절반 이상을 읽고 있었다. 그는 앞에 있고, 나는 뒤에 있다.“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유희처럼 슬픔의/ 씨를 뿌리는 주인공의/ 젊은 날”을 읽고 있었고, 나는 그 슬픔이“불행의 열매로 무르익어”따지 않으면 안 되는 노년의 삶을 읽고 있었다. 제아무리 고귀하고 위대한 꿈도 그 꿈을 펼칠 무대가 주어지지 않으면 슬픔의 씨앗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 슬픔의 씨앗을 기쁨의 씨앗으로 변모시키려는 그 모든 노력은 다만, 도로아미타불의 그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는 그 젊은 주인공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듯이“가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눈부시게 올려다 보고”,“나는 계속 아래를 보고/ 눈시울을 붉힌다.”시계바늘이 떨어졌고, 어떠한 대반전도 없이 기차여행은 끝난 것이다. 아래는 아래이고 밑바닥이며, 더 이상의 역전이나 어떤 기적도 일어날 수 없는 곳이다. 모든 희망과 모든 출구가 막혀버렸기 때문에, 나는 나의 눈시울을 붉히고, 애써 그를 마주보며 찡긋 웃는 것이다.
젊음은 가볍고 두 발에 날개를 달고 여행을 떠나가고, 늙음은 무겁고 그 모든 여행이 끝난다. 그는 앞부분에서 절반으로, 나는 절반 이상에서 마지막 부분으로 책을 읽는 동안,“가벼움과 무거움이/ 시작과 결말이”서로 만나“인사를 한다.”마치,“똬리를 튼 생의/ 머리와 꼬리가 슬쩍 스치는/ 순간”처럼----.
정해영 시인의 [찡긋 웃는다]는 앞부분에서 절반 이상으로 읽는 그의 이야기와 절반 이상에서 마지막 부분을 읽는 나의 이야기, 즉, 이 두 개의 이야기가 마치 격자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며, 발단, 전개, 대단원이라는 주제(인생여행)로 끝을 맺는다. 이 세상의 삶은 지구별로의 여행이고, 모든 인생은 시시하고 비극적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찡긋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슬픔의 씨앗을 뿌려 불행의 열매를 수확하는 것이다. 뜬구름 잡는 식의 희망과 무모한 열정, 그 모든 사랑과 분노와 수많은 절망과 이전투구들이 다 부질없이 끝나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가 다같이 찡긋 웃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찡긋 웃는 것만이 이 불행, 이 비극적인 결말을 더 이상 허무하지 않게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물빛 토론 시간에 함께 토론한 정해영샘의 시와 해설이 보여 정겨운 속삭임에 올려 봅니다 토론 시간에도 좋은 시라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던 시였는데
역시 해설로 좋습니다 물빛님들 모두 함께 감상하면 남은 사월이 더욱 풍성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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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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