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께서는 장자의 <나비의 꿈>이나 천상병 시인의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귀천)을 예로 들면서,
세상살이가 꿈 속의 잠깐 같다고 늘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이 구속적이고 제한된 느낌을 준다면
“밖으로 나가는” 것은 해방이요, 자유일 것입니다.
우린 교수님을 꽉 붙들어 매고 있고 싶습니다만.... ㅎㅎ
교수님께서는 시에서 이와 같은 꿈을 원석(소재)이라 한다면
이를 제련하는 시화화의 과정에서 독자에게 잘 전달되도록
시를 다듬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어 藝術>이라 함은 곧 <언어 技術>이기도 하다는 말씀.
에릭 프롬의 <사랑의 예술>이 <사랑의 기술>로 번역되는 이유도 그러하다는 말씀.
박수하님께서는 이 시를 읽으시고 영화 <인터스텔라>에 접목된 것 같다는 말씀.
(우리가 그 머시기, 망해가는 지구와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전생에도 못해 본 그 참 어려운 숙제를 하고 있는 SF영화???)
거기 물리학자들이 동원됐다는데 교수님 역시 물리학을 좋아하시니 척척 맞아떨어지는 연상!!^^
시를 공부하는 동인들의 입에서 하나같이 “너무 좋다”라는 말씀들만 나오고....
<꿈 속의 잠깐> 시리즈 중에서 오늘 이 시가 제일 크게 와 닿는다는 말씀도 주셨습니다.(하이디님)
이후에, 시리즈 10회차가 발표되어도
그때도 역시, “시가 정말 좋다”라고 모두들 그렇게 하실 것 같습니다.
시를 읽는 시간(독자의 시간)이 동시대와 관련 있기 때문에 더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유리방/토끼/천사/삶의 바깥” 이 시가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키워드일 것입니다.
아무도 질문을 안 하시니, 조르바가 농담 삼아........
화자가 안고 싶은 대상은 토끼였을까요, 멀리 있는 천사였을까요???
그런 생각을 흘려봤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