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박물관
남금희
사직서를 내자
달아나던 시간들이 열없이 멈춰 선다
짐을 꾸리며
가장 크고 무거운 짐 덩어리는
유에스비 안에 옮겨 담는다
십수 년의 기록이 사뿐히
방을 바꾼다
종이 한 장 없이
클릭하지 않으면 되살아나지 않을
유물들이 깔린
여기는 구름의 박물관
날마다 문 두드리며 씨름하던 몸이
식은 커피처럼 적막해지는 사이
구름 한 점 속에 또 다른 구름이
열리고 닫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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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구름’)과 문명(‘유에스비’)의 만남은 쉼을 얻고서다. 바로 그 순간, 시인은 USB(Universal Serial Bus)가 우주고 구름이고 박물관임을 안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는 문명사회의 현실을 특징적으로 반영하는 명제에 속한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결별해 있으면서 이어져 있다는 사실. 유에스비는 그 이음(Fügung)의 매개물로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있다. 그것은 구름의 입자처럼 작고 가벼우면서도, 딴은 “가장 크고 무거운” 박물관으로 기능한다. 박물관(museum)은 본래 사색의 장소를 말하며, 물질적 유산을 보존하고 설명하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 대학의 원형(原型)이다. 시인이 십수 년간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던 모든 지식과 정보는 여기 작은 이동식 기억 장치, USB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직서를 내고 멈춰선 시간과 자아 앞에 가로놓인 구름의 박물관, 유에스비는 이제 “클릭하지 않으면 되살아나지 않을/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유에스비와 유물의 관계는 검은 매화나무 등걸에 하얀 꽃이 핀 것처럼, 가장 새로운 것과 가장 오래된 것의 만남, 그것은 현대시가 새롭고 깊이 있게 모색하고 천착해야 할 지점이다. 고금(古今)의 사유와 상상력이다. ‘구름-박물관-유에스비’의 등가 관계는 접(接)의 경우처럼, 일견 중간자의 기능과 의미를 갖는다. 구름은 정신적 여유와 생각의 깊이를 갖게 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권운-층운-적운) 터에 전형적인 것은 드물고 중간적 성질을 갖는다. 박물관은 시간의 유동과 부동을 지속적으로 연결하는 장(場)이며, 유에스비는 인간과 문명을 매개하고 기억을 저장하는 장소다. 유에스비가 보유하고 있는 “기억(이란) 자연보다 인간이 만든 도구들이나 역사적인 기록들보다 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기록들이다”(한스 마이어호프, 『문학 속의 시간』). 그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기록은 “날마다 문 두드리며 씨름하던 몸”이 산출해낸 것들로서 정지되고 적막한 시간이 흐르고나면, “구름 한 점 속에 또다른 구름이/열리고 닫힌다”. 이 때 “또다른 구름”으로서 유에스비는 존재의 드러냄과 감춤, 닫힌 열림이다. 그 비밀의 문학장(文學場)은 주체와 타자가 새롭게 만나는 접점이며, 문명의 기호학이다. 인간 실존이 거듭나는 순간이며, 구름의 형이상학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현관(玄關)이다. 다만, 사실과 환상을 잇는 다른 사유 이미지와 보다 예각적이고 미적인 장치가 좀더 뒷받침되었더라면, 하는 일말의 아쉬움이 있다.(김상환)
*김상환 시인 선생님께서 써 주신 감상평을 옮겨왔습니다. (물빛 37집 162-164쪽)
**남금희 회장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예쁜 물빛 37집~ 깊이 감사드려요^^
비싼 호두시루(떡)도 3박스나 찬조해 주셔서 가족들과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이정수 교수님께서 보내주신 사진입니다. 작가님의 작품사진은 역시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