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 할 자신이 생겼다
정해영
아침에 눈을 뜨면
밭고랑의 고추모종처럼
슬픔이 자라 있다
백 년 전에 뿌린 씨앗도
자라 있다
어젯밤에 심은 씨앗도
싹이 보인다
할머니는 해가 뜨면
밭고랑에 납작 붙었다
종일 엎드린 기도로
가지며 호박이며 고추를
가꾸었다
가꾸는 일은 거두어들이게 하는 일
어느 날은 바람 속에 살고
어느 날은 햇빛 속에 서 있는
오래 가꾼 이 일은
할머니 농사와 같아
가꾸는 손놀림에 신귀가 붙어
반질하다
슬픔도 오래 가꾸면
거두어들이는 것이 있어
한들한들
비바람 앞에도 춤을 춘다
가볍게 흔들린다
*최문자 시집에서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