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지는 순간 / 문태준 > 정겨운속삭임

본문 바로가기
|
20-10-12 15:59

어두워지는 순간 / 문태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목    록  
어두워지는 순간


- 문태준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 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가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 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 게 달리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가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 시집 『맨발』(창비, 2004)
TAG •
  • ,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목록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6621
이도원 동인(소설)의 2020년 현진건문학상 수상 소식
조르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6
889
6620 답변글
대단혀!
두칠이 이름으로 검색
10-26
393
6619 답변글
축하축하 합니다.
목련 이름으로 검색
10-27
144
6618 답변글
아 아름다운 가을
하이디 이름으로 검색
10-27
159
6617 답변글
아 아름다운 가을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7
164
6616
먼 길
이재영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2
352
6615 답변글
먼 길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7
210
6614
겨울 산 / 곽미숙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3
544
6613 답변글
겨울 산 / 곽미숙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3
133
6612
줄탁 소리
두칠이 이름으로 검색
10-13
383
6611 답변글
줄탁 소리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3
372
6610 답변글
줄탁 소리/터득
인기글
두칠이 이름으로 검색
10-14
1225
6609
꽃밭에서 / 전 영 숙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3
348
6608 답변글
꽃밭에서 / 전 영 숙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3
221
6607
슬퍼 할 자신이 생겼다
하이디 이름으로 검색
10-13
217
6606 답변글
슬퍼 할 자신이 생겼다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3
231
»
어두워지는 순간 / 문태준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10-12
214
6604
제882회 <물빛> 정기 시토론회 안내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10-12
192
6603 답변글
제882회 <물빛> 정기 시토론회 안내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3
546
6602
추석 달을 보며 / 문정희 시인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10-12
236
6601
가을 산에 올라
이재영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03
317
6600 답변글
가을 산에 올라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3
910
6599
고쳐보았습니다.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9
233
6598
등대가 보이는 바다
여호수하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9-22
165
6597 답변글
등대가 보이는 바다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5
451
6596
루키가 잭에게 손을 내밀었다(881회 토론용 시)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2
502
6595 답변글
루키가 잭에게 손을 내밀었다(881회 토론용 시)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5
471
6594
주인, 돌아오다
침묵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9-22
202
6593 답변글
주인, 돌아오다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5
210
6592 답변글
주인, 돌아오다/훈수
두칠이 이름으로 검색
10-13
352
6591
수국을 잃고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9-22
261
6590 답변글
수국을 잃고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5
268
6589
해후 / 이규석
cornerlee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9-22
238
6588 답변글
해후 / 이규석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5
303
6587
혼잣말
하이디 이름으로 검색
09-22
180
6586 답변글
혼잣말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4
464
6585
그 날 (정정지)
목련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9-22
172
6584 답변글
그 날 (정정지)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3
157
6583
881회 시 토론회 안내(9월 22일, 화, 19시)
인기글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1
1225
6582 답변글
881회 시 토론회 결과 보고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3
595
6581
애모
이재영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9-20
173
6580 답변글
애모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23
158
6579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에게 보내는 편지"
조르바 이름으로 검색
09-11
146
6578
880회 정기 시 토론회(T그룹 통화) 결과 보고
조르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9-09
629
6577 답변글
880회 정기 시 토론회(T그룹 통화) 결과 보고
이오타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9-10
366
6576
지금은 전쟁 중/곽미숙
조르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9-08
459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Copyright © mulbit.com All rights reserved.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