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마른 아우의 죽음과 이장 관련 내용을 시화했습니다.
다만 개인의 특수한 진술을 일반적인 말로 풀어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2. “솟대 곁에 서서 두리번거리고/
하늘로 목청 가다듬어 살려 달라 소리쳐도/
어른거리는 그림자 하나 없어/
신작로 위로 구르던 말 쉰 소리되고 말았다”는
아우의 고통스런 정황인데
화자가 아우의 고통을 옆에서 보는 것처럼 설명해 줘서
독자가 개입할 심리적 공간이 남지 않은 셈입니다.
특히 “하늘로 목청 가다듬어 살려 달라 소리쳐도”에서
절박한 자는 목청을 가다듬어 말할 겨를조차 없을 테니
목청껏 소리치는 게 더 자연스런 일일 것 같다는 말씀도 주셨습니다.
3. “목이 말라 마신 물, 물이 아니었나”
요절한 아우의 결단이었겠지만 화자만이 아는 독백이어서
이러한 개입 때문에 시가 시답지 못하게 되거나
시적 흐름이 끊어집니다.
산문이 돼 버릴 수도 있겠지요.
산문시는 시의 영역으로서 시상의 흐름이
행을 끊기 어려울 때, 행갈이를 하지 않고 계속 이어가는 것이고
산문은 이규석 선생님이 통달하신 줄글로서
전지적 시점이 가능한 서사에 해당하겠지요.
관련 없는 얘긴지도 모르겠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연극 용어가 있는데요,
신(Deus)이 기계(machine)를 타고 갑자기 내려와(나타나)
꼬인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어떤 인물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됐을 때
갑작스럽게 죽음으로 처리한다든가 이민 간다는 식으로
다음 설정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이를 시에 원용하자면
화자의 돌출 반응, 화자 맘대로 이리저리
시 안에서 교통정리를 해가며 설명하는 경우가 되겠지요.
화자의 친절한 과잉간섭이 오히려 시적 흐름을 방해합니다.
4. “고향으로 돌아와 묻혔다”의 시제와
“그가 누운 자리엔”의 시제상 무리가 있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럼 “누웠던”이라면 무리가 없을까요?
우리말 시제는 영어의 그것보다 애매한 경우가 많아서... 두렵네요.
시를 펼쳐놓고 함께 토론하면
혼자서는 놓친 이런 문제도 발견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삼조, 사조!
애말랐던 아우의 기억을 꺼내서 시화하는 일은
형으로서 꼭 추모해야 할 일종의 숙제가 되는 것이겠지요.
아우 추모시 한 편 따로
이장 관련 시 한 편 따로
이렇게 두 편을 쓰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조르바의 못다한 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