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비망록
이진엽
강물은 오늘도 소리 없이 깊어 간다
방죽에 서서 오래 귀를 기울여 보지만
아무도 강의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돌 하나를 들어 멀리 물속으로 던져도
강은 좀처럼 대답해 주지 않는다
저 강이 음각해 놓은
영원한 침묵 속의 숱한 언어들
그 젖은 비망록을 천천히 들추어 보면
혼자 수화를 하는 강의 손가락이 보인다
말하지 않아도 가장 깊은 말씀들
소리치지 않아도 가장 빛나는 금의 언어를
강은 연신 토해 낸다
가슴이 아린 사람들 그 강가로 내려가
한 움큼 물을 퍼 올려 귓가에 대어 보지만
강은 그저 조용히 웃을 뿐이다
말하지 않아도
한 시대의 삶과 눈물을 모두 껴안으며
강물은 다만 소리 없이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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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회장으로서 못다한 일, 동인지 발송과 물빛 연혁을 정비하기 위한 작업이 남아있습니다. 그동안 물빛 회장을 거쳐간 분들이 꼼꼼히 기록해 온 물빛회의록과 가계부, 낡고 오래된 그것이 또 이렇게 유용히 쓰이게 되었습니다. 한 부도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해 온 지난 시간들을 펼쳐보며 우리 물빛의 역사를 재정비하는 일이 마치 이진엽 선생님의 시, <강의 비망록>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