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 골이 불탄다.
돌샘 이재영
우리가족 일행이 낙산사 호텔에서 잤다. 새벽에 동해에서 혓바닥 내밀듯 솟아오르는 일출을 구경하고 꿈에도 그리던 설악산으로 향했다. 설악의 단풍은 외설악의 천불동계곡, 내설악 가야동계곡, 남설악 주전골이 제일이다. 우리가 탄 승용차는 주전골을 보기 위해 청명한 가을 새벽공기를 가르면서 오색에 도착했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서 따끈한 북어 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서둘러 매표를 하여 오색약수터로 갔다. 아무도 없어서 이 약수 저 약수를 마음껏 마셨다. 나트륨이 많은 이 약수는 소화부량과 위장병, 피부병에 특효라 한다. 넓은 바위틈 곳곳에서 솟는 약수마다 맛이 달 라 신기하다. 우리가 나오니 사람들이 약수터 앞에 장사진을 이룬다.
계곡난간에 붙어 철다리길 따라 주전골의 품안으로 빨려가는 행열이 장관이다. 주전골은 옛날 도적들이 위조엽전을 만들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계곡 난간엔 성국사 암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가 진빨강이 되어 사찰 벽과 조화를 이루고 눈을 끌어당긴다. 계곡 흰 돌바닥에 담긴 청옥물빛이 곱고 맑다. 석산은 새 옷을 갈아입고 대머리위엔 기암괴석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금방 와르르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바위산에 용케 붙어선 푸른 소나무와 핏빛, 노랑, 녹색, 단풍잎들이 어우러져 알록달록 탄다. 그 속에 우리의 기쁨은 절정으로 치닫건만 나무들은 내년 새 삶을 위해 최후를 맞고 있다. 그러나 아품을 묵묵히 찬고 성자처처럼 의젖하고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네 모습 자랑스러워 부럽다. 인간은 죽음 앞에 나약하고 추한 모습이나 마지막 길에서도 저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베풀고 떠나려는 너희들 앞에 선 내가 한없이 무색해진다.
산과 산 사이로 청옥색 계곡물이 폭포 되어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에 온갖 잡념들이 일시에 녹는다. 병풍처럼 둘러선 봉우리 사이로 구불구불 돌아가는 절벽에 붙어선 형형색색의 단풍나무들이 어우러진 환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우리는 정신을 곧 빼앗기고 만다. 어제의 강행군과 돌계단의 고단함을 잊은 채 탄성을 연발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된다. 길이 구비 칠 때마다 계속변하는 풍광에 여기가 선경이 아닌가 하고 착각을 연속한다. 돌아보니 붉으래 상기된 얼굴 모두 청춘이 된 듯 단풍에 활활 불타며 웃음꽃이 활짝 핀다.
주전골은 계곡모양에 따라 이쪽 저 쪽 계곡으로 오가면서 걸을 수 있도록 많은 무지개다리가 조성되어 운치가 절정이다. 다리를 건너면서 명경 같은 계곡물을 바라볼 수 있어서 계곡 깊은 골짜기까지 한 눈에 보여 자연이 만든 신비경을 연출한다. 옥같이 맑은 물은 암벽을 곱게 다듬어 청류로 흐르다가 목욕탕같이 아담한 소를 만들고 거울로 변한다. 여긴 내 마음도 비쳐올 것 같다. 이곳이 선녀탕이다. 여기서 서니 선녀들은 어디로 갔나 우리가 신선과 선녀가된다.
천불동계곡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독주암이 계곡을 낀 산사이로 연꽃봉오리처럼 솟아 바위봉의 위용을 떨치니 신비를 한없이 자아낸다. 그 뒤엔 저만치 칠형제봉이 나란히 빼어난 절경을 앞 다투어 뽐낸다. 혼자 앉을 만한 독주암 정상 연꽃봉에 내가 오르면 무슨 생각이 날까?
굽이굽이 들어갈수록 수종도 다르고 산세가 새롭다. 바위 전신이 구멍 난 들쥐들의 아파트를 지나 큰 바위틈으로 빠져나간다. 여기가 주전골 금강문이다. 이 문을 통과하면 별천지, 시루떡 같은 바위가 엽전을 쌓아둔 것 같다. 저 바위가 주전골의 유래가 담긴 바위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계곡이 살아 숨 쉬며 단풍의 특징이 뚜렷하다. 여기서부터 적색은 진홍끼리, 황은 진노랑끼리 어우러져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앞이 가리더니 둥근 바위구멍 속에서 흰 물줄기가 쏟아지고 바위 밑은 청옥물감을 풀어놓은 듯 파랗다. 그 안에서 찬바람이 일어나며 물소리가 요란하다. 여기가 용소폭포다. 옛날 이무기 한 쌍이 천년을 살다가 한 마리는 승천하고 암놈이 혼자 남아서 서러워하다가 바위와 폭포가 되었다고 하니 왠지 마음이 찡한다.
반대쪽으로 가파른 바위계곡 길을 원숭이처럼 기어오르면서 한참 올라갔다. 이 물줄기는 점봉산에서 시작하여 주전골 비경을 이루며 열두 폭굽이치며 흘러 급하게 떨어진다. 여가가 12폭포라 한다. 물이 많으면 웅장하고 장관일 텐데 개울물처럼 졸졸 흘러 실망이 크다. 미리 알았다면 여기를 포기하고 좀 멀지만 여심폭포(女深暴布)를 가보았을 텐데 아쉽다. 가녀린 한 가닥 물줄기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떨어지는 폭포, 바위와 물의 절묘한 조화가 여성들의 깊숙한 그 곳을 연상케 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호기심을 일으키다.
주전골은 가을 단풍 때만 좋은 것은 아니다. 바위와 산, 계곡, 물, 나무 등등 이 풍부한 자연으로 누가 저렇게 조화롭고 절묘한 예술의 극치를 자랑하는 걸작품을 만들었을까? 인간의 예술품이 아름답다하지만 저 신의 예술품에 비하면 얼마나 조잡한가? 주전골은 자연 그 자체가 아름다워 사시절 어느 때 와도 절경이요 절정이리하리라. 금강강산을 다녀온 한 무더기 노안들이 여기가 금강산보다 아름답다고 절찬을 하며 감탄한다. 한 바퀴 돌고나니 108 번뇌가 일시에 눈 녹 듯 사라졌다. 연인, 어린이나 노약자까지도 산행할 수 있는 코스를 며칠간 쉬면서 가을산 명품의 삼매경에 빠져보고 싶건만 떠나는 마음 애인을 두고 가는 듯 애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