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돌샘 이재영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나는 성삼문의 이 시를 지극히 좋아했다. 성삼문은 죽음 앞에서도 꺾일 줄 모르는 기상으로 담담하게 이 시조를 노래로 불렀으니 얼마나 참되고 장부다운가? 노송을 보면 나도 저소나무처럼 또 성삼문처럼 살리라 하고 어릴 때부터 그 꿋꿋한 절개와 기개를 닮고자 했다.
내가 소나무다운 노송을 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예천군 호명면 선몽대(仙夢臺)라는 정자에 소풍을 가서였다. 내성천 괴암절벽 가에 하늘 날아오를 듯 서있는 정자를 둘러싸고 강변 따라 초원위에 수만 평 낙락장송밭이 펼쳐진 것을 처음보고 놀라고 감탄했다. 이 정자는 퇴계선생의 증손이 창건한 것으로 정탁, 류성룡, 김상현, 이덕형, 김성일, 정약용등 퇴계학맥의 쟁쟁한 분들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낙조에 붉은 해가 노송가지에 걸려 하얀 백사장과 수 백리 강물을 비추는 모습은 황홀하여 서해의 낙조를 연상케 했다. 나는 여기 산뜻한 공기와 솔향기, 낙조의 낭만에 매혹되어 야영을 꿈꾸었지만 아직 실천하지 는 못 했다.
직장동료 서너 명과 영남알프스인 취서산 신불산 간월산을 언양에서 올라 통도사 쪽으로 내려갔다. 백운암에서 통도사까지는 약 한 시간 거리이다. 통도사 남동쪽으로 계곡 따라 가는 길 양 편에 하늘 찌를 듯 곧은 수 아름 적송들의 행렬이 펼쳐졌다. 거북등처럼 갈라진 껍질의 멋스러움과 맑은 계곡물에 듬성듬성 솟아있는 수석들이 노송과 어우러진 풍경은 통도사입구까지 연속되어 소나무천국으로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소나무 숲길처럼 신선하고 산듯하며 쾌적한 길이 또 있을까? 꽃길은 아름답기는 하나 오래 기억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소나무 길은 은은하나 그 향기와 신선함과 상쾌함은 군자의 마음처럼 변함이 없어 늘 그리운 이상천국으로 내 가슴 속에 살아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오면 절구경은 항상 뒷전이었다. 그러나 나무마다 주사기를 달아놓아 마음 아찼다. 여름방학 때 가족동반하고 다시 찾아오리라 다짐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이곳을 떠났다.
사람 사는 것이 어찌 마음같이 되는가? 사오 년 뒤에 찾아 갔더니 그 소나무들과 통도사 입구 노송들도 다 죽고 새로 심은 작은 소나무들뿐이었다. 그리운 애인을 만날 찰나에 잃은 듯 서운하고 애틋했다. 소나무야 어찌 여기뿐이랴. 전국 명산에는 금송, 적송, 금강송등 나무의 군자인 소나무들이 많이 있지만 봉화청옥산 일대에 자라는 춘양목이 내겐 또 인상 깊다. 토심이 얕고 땅 밑에 바위가 있으면 나무가 굽는다고 한다. 그러나 봉화를 가보면 그 말은 실감을 주지 못한다. 온통 바위신인데도 아름드리적송들이 하늘 찌를 듯 곧아 준수한 청년 같기 때문이다.
외그루로는 법주사 가는 길에 정이품소나무와 예천 감천에 땅을 가진 석송령이 유명하여 알려져 있지만 나는 팔공산 돌구멍절 뒷봉 큰 바위 위에선 만년송(萬年松)을 가장 선호한다. 이 소나무는 적송으로 100여 평 바위에 우뚝 서서 뿌리와 줄기가 바위를 덮어 강건하며 늘 청청하고 깨끗하여 군자의 품위를 지녔다. 키는 크지 않지만 그 가지와 뿌리의 세력은 바위를 깨트릴 듯 강하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모진 풍우를 이기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소나무 앞에서면 배우고 느끼는바 너무도 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내가 소나무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는 이미 많이 밝혔지만 무엇보다도 소나무는 오덕(五德)을 갖추고도 뽐내지 않아 아름답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오덕은 무엇인가? 지(智), 신(信), 勇(용), 인(仁), 업(業)과 엄(嚴)이다. 가난을 이겨내고 몸이 아플 때 약이 되는 것은 지요, 사철 변함없어 군자의 마음 같은 것은 신이다. 어려움에 굴하지 않으니 용이요, 줄기는 재목되고 잎은 자연으로 돌아가니 인이다. 척박한 토양에도 잘 적응하고 개척정신이 있음은 업이요, 눈바람에도 위풍당당함은 엄이다.
소나무는 풍우가 휘몰아쳐도 휘는 듯하다가 다시 꼿꼿이 제자리에서 있다. 항상 변함없고 화려하지 않으면서 사람에겐 한없이 위안을 준다. 눈바람이 몰아아치는 역경에도 푸름을 잃지 않아 죽 매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로 칭송받기도 한다. 그래서 선비들에겐 군자 또는 절개와 장수를 상징하기도 하고 인공을 가하지 않아도 자연미가 으뜸이다. 나는 소나무를 보고 있으면 항상 내 마음은 푸르고 맑아 소나무가 좋다. 소나무가 아름다운 곳으로는 안면도니, 진부령이니, 설악산 수렴동계곡이니 하나, 나는 선몽대의 낙조 때 본 소나무보다 더 아름다운 솔밭단지를 본 적이 없다. 이 솔밭이 지금까지 있다면 관광자원으로 지금의 몇 백배 가치가 있고 역사적 의미도 크건만 그 솔밭도 이젠 다 논밭으로 변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2011. 7. 13. 소나무의 오덕 시를 읽고
가로등
돌샘 이재영
동그란 눈 하나
누구를 그리도 애타게 기다리나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아무도 없는 밤거리에 우뚝 서서
약속도 없으면서
무작정 가다리는 천치인양
지칠 줄도 모르는 듯
한 치 흐트러짐도 없다.
가로등,
저기 누가 온다
너 앞에 서면
왠지 나도 네가 되어
누구를 몹시 기다린다.
어제 물빛 시모임에서 평가 받고 수정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