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님 홈에 있는 문태준 시인의 시를 한 편 슬쩍해 왔습니다.^^
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
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
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방이 방 한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 가
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
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
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
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꾸어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
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