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어떻게 알고 물빛을 방문했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이렇게 고운 글도 올려주셨네요.
날씨가 많이 찹니다.
건강유의 하시고요.
*
누이에게
이성렬
여름비 내리는 정거장에서
하루는 또 그렇게 허물없이 열리고
지상의 사나운 시간들 속으로
강변의 버드나무는 힘든 그늘을 드리웠네
흐린 가을에 얼굴을 묻던 누이여
행선지 적힌 객차들은
희미한 불빛만 남기고 수없이 지나갔지
이분법에 익숙한 나의 볼펜은 언제나
술이 깨면 사라지는 쌍꺼풀처럼 위태로웠고
마음속 작은 연습지들은
공중에 걸린 현수교 난간들처럼 스산했지
나의 고독한 유물론은 안개 낀 아침에
피어나는 어진 꽃들을 믿지 않았으니
그것은 좌절한 인류학자의 탄식 같은 것
반사 신경을 잃은 내 연골들은
엷고 허연 배를 드러내며
물 위로 떠오르려 하는구나
거식증의 투명한 젖가슴을 가진 누이여
망각은 참으로 느리게 오는 것
시험 답안을 작성하듯
가난과 사랑의 아픈 반향을
꼼꼼히 되새기는 누이여
강가의 바람은 돛 끝에 몹시 어지러우나
나는 엉망으로 취한 채무자가 되어
초롱꽃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 방의 등잔불빛만을 기억하고자 하네
빗줄기를 끊어 내는 창유리 밖에서
물 위를 떠도는 소금쟁이 발자국 소리와 함께
도요새의 네 눈빛이 메아리처럼 쟁쟁한데
잠시나마 따뜻했던 나의 빗장뼈와
불빛이 스치고 간 정거장들을 노래하려네
-계간 <서정시학> 2002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