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다음날, 하늘은 맑게 개여 있었다. 안개에 가려져 있던 눈 덮인 한라산 정상이 뚜렷하게 보였다. 한라산을 직접 눈으로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늘은 제주도 서쪽을 돌아본다는 계획이 잡혔다.
남편은 학창시절 국사책인가 나왔던 애월리 빌레못 동굴에 가 보자고 했다. 헉, 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지명이었다. 랜트카에 붙어있는 내비게이션만 믿어 보는 수밖에. 삼나무가 쭉쭉 뻗어있는 길을 지나 95번 도로로 한참을 달려갔다. 마을의 담과 무덤 그리고 밭들이 구멍 뚫린 현무암으로 둘러싸여 제주도만의 독특한 시골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밭에는 싱싱한 양배추가 자라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은 빌레못 동굴이라는 표지판도 없는, 포장되지 않은 샛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차 바닥이 심하게 긁히는 소리가 났다. 길을 되돌아 나와 마을 가게에 가서 물었다. 가게 할아버지는 “빌레못 동굴, 그곳에 가 봐야 이제는 흔적도 없어” 하셨다. 이미 그곳을 지나쳐 왔고 그런 곳에 뭐 하러 찾아가느냐는 요지의 이야기였다. 먹고 놀고 하는 곳엔 표지판을 번지르르 잘도 해놓았던데… 교과서에 나온 곳이라면 꽤 유서 깊은 곳일 텐데 왜 표지판 하나 제대로 세워놓지 않았을까. 우리가 그냥 지나쳤던 것일까. 맥이 조금 풀렸다.
해안도로를 달리다 아름다운 섬 비양도가 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바다는 경계선이 뚜렷했다. 이런 제주도의 바다 색깔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남빛, 쪽빛 아니면 옥빛… 속이 훤하게 보였다. 봄빛을 토해내는 남쪽 바다였다.
똥을 받아먹는 돼지를 비롯한 현무암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인물 군상들을 조각해 놓은 금능석물원에 들렀다. 마치 민속촌에 온 것처럼 제주사람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았다. 난쟁이 마을에 온 듯 아이는 이 집 저 집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밭에 무를 수확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물빛 모임에서 먹은 단단하고 달달하던 무가 생각났다. 이 밭에서 생산한 월동 무였나 싶어 내심 반가웠다. 생산량 조절 실패로 인해 가격이 형편없이 떨어져 제주도산 무, 양배추 등을 상당량 폐기처분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렇게 돌 많은 척박한 환경에서 지은 채소들을 버리는 그 심정이란...
오후가 되자, 바다 빛깔이 또 달라져 있었다. 상모리 해안도로를 돌아가니 바닷가에 큰 언덕처럼 솟은 송악산이 보였다. 해안가로 내려갔다. 물결이 운다 라는 뜻으로 송악산을 제주 사람들은 ‘절울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물결이 울고 또 울며 만든 해안 절벽 퇴적층은 감탄사가 나올 만큼 선이 부드러웠다. 그런데 물결이 지나간 그 오래된 자리에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 때 제주사람들을 동원시켜 만들었다는 동굴이 여러 개 파여 있었다. 모래가 검었다. 송악산 주변에는 일본이 미군 공습을 피해 만들어 놓은 방공호 내지는 격납고가 아직 남아 있고 제주도 4.3항쟁 때 희생당한 수많은 양민들의 무덤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언덕 초지 위에는 말과 염소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멀리 마라도와 가파도가 바라보였다. 송악산이 이토록 처연할 정도로 화려해 보이는 건 이렇게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어서일까.
사계리 해안에 있는 산방산은 모양이 특이했다.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화산이었다. 바로 밑에 있는 용머리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 활짝 핀 유채꽃이 나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산방산 중턱에 있는 산방굴사에 올라갔다. 골다공증에 걸린 사람의 뼈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곳도 있었다. 굴 천장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모인 약수를 마셨다. 물이 달고 맛있었다. 길가에 동백꽃이 봉우리채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