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본질과 시인의 숙명
이 진 흥
일찍이 하늘과 땅의 결혼으로 대지는 식물, 동물, 인간이라는 세 자녀를 갖게 되었다. 어머니인 대지는 본래부터 그렇게 있는 피지스(physis) 즉 자연(nature)으로서 그 자녀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간섭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런데 셋 중의 막내인 인간은 어머니를 배반하고 스스로 만든 울타리 안에 자신을 가두고 비본래적인 삶을 살고 있다. 우선 장녀인 식물은 대지에 뿌리를 박고 마치 뿌리라는 탯줄로 이어진 자궁 속의 태아처럼 어머니인 대지와 한 몸처럼 일체화하여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차남인 동물 또한 수평적인 대지에 자신의 몸을 평행으로 하여 한 번도 어머니를 거스르지 않고 착하게 순응해서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아래 제시한 그림에서 보이듯 식물과 같은 뿌리도 없는데 동물처럼 어머니에게 순응하지도 않으면서 수평적인 대지를 거역하고 수직적으로 서 있으니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수평적인 대지 위에 수직적으로 서 있는 인간의 자세는 마치 결핍의 여신 페니아와 풍요의 남신 포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에로스처럼 어머니인 대지에 발을 딛고 아버지인 하늘을 향해 상승코자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식물이나 동물과는 달리 머리를 하늘로 치켜든 직립자세가 지적인 발달에 도움을 주었지만 그러나 어머니를 배반한 인간은 늘 추위와 배고품 그리고 삶을 위협하는 여러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뿌리가 없어 바람이 불면 넘어지는 인간에게는 횔덜린의 시구처럼 가장 위험한 재보(der Güter Gefährlichstes)로서 언어가 주어진다. 언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최상의 보물이지만 그것은 그만큼 위험한 것...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지만, 세 치의 혀가 삼족을 멸할 수도 있다는 게 바로 그것을 말한다. 어쨌든 언어는 원래 불안정한 인간이 어머니인 대지와 소통할 수 있는 도구로서, 뿌리도 없이 부유식물처럼 떠다니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언제 어디서나 어려움에 처할 때 즉각적으로 어머니와 소통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준 최상의 보물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의 그 본래적인 용도를 망각하고 그것으로 어머니인 대지 위에 울타리벽을 쌓기 시작했다. 그 벽은 바람을 막아주고 무서운 동물의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성벽이 되었다. 위협을 줄이고 더욱 안전하기 위하여 울타리는 점점 더 두껍고 높아져서 인간은 안심하게 된다. 게다가 저 프로메테우스에 도움으로 불까지 얻게 됨으로써 어둠을 밝히고 추위를 몰아내며 보다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삶을 산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울타리의 안쪽을 갈고 경작해서(cultivate) 보다 안락한 삶의 공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문화(culture)이다. 어머니인 대지와 소통할 언어를 문화의 울타리를 건설하는데 사용하면서 대지와 대화를 단절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어머니의 존재마저 망각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대지에 대한 반역이었다. 다시 말하면 본래적인 네이쳐(nature)를 비본래적인 컬쳐(culture)로 바꾼 것, 그것은 겉보기에 인간이 스스로 이룩한 위대한 성취로 보이지만 바로 이 점이 인간을 대지로부터 소외시키고 자연에 대한 반역아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울타리 안쪽인 <문화>의 공간은 아늑하다. 바람은 인간이 쌓아올린 울타리 벽에 의해 차단되고 추위는 불로 녹였으며 배고품은 노동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수평적인 대지 위에 수직으로 직립하여 머리를 들고 선 덕분에 知的인 발달을 할 수 있었던 인간은 지식을 축적하여 역사를 이룩하고 생활의 편의를 도모했다. 인간이 갖고 있는 탁월한 적응력으로 그는 자신이 만든 문화에 스스로를 길들였고, 대지의 본래 모습인 자연과는 점점 멀어졌으며 기술이 늘고 富가 쌓일수록 울타리의 벽은 더욱 견고하고 높아져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울타리의 안쪽(culture)과 바깥(nature)은 점점 더 이질화했는데, 안쪽의 문화적인 공간이 일상세계이다. 그리고 일상세계에서 울타리 바깥의 본래적인 대지(자연)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인간이 일상인(das Man 혹은 세속인)이며, 그에게 편리하고 익숙한 울타리 안쪽의 상황이 <일상성(Alltäglichkeit)>이다. 그러므로 일상성이란 본래적인 자연(physis)에서 멀어진 비본래성이고, 따라서 그 앞에 펼쳐지는 것은 현상(das Phänomen)이 아니라 假象(der Schein)일 수밖에 없다. 본래 자연은 대지의 실재모습이고 문화는 그 자연에 인공의 힘을 가미하여 변용시킨 산물로서 비본래적이고 反자연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지(자연)의 아들로 태어난 인간이 어머니인 대지에 차폐의 벽을 쌓고 문화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은 비본래적인 삶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culture)는 자연(nature)에 대한 배반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문화라는 일상성에 스스로를 길들인 일상인이 되어 울타리 바깥의 본래적인 자연을 망각하고 비본래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날 울타리 안쪽에서 일상성에 안주하여 살던 한 예민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 울타리 밖에서 들려오는 자연(physis)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미세하지만 강렬했고, 낯설면서도 어딘가 친근한 것이어서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울타리의 갈라진 벽 틈으로 바깥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어렴풋이 보이는 바깥에서는 지금까지 잊고 있던 무엇인가가 어른거린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그는 벽의 일부를 헐어내어 틈을 더 벌린다. 그의 손톱은 갈라지고 피가 흘러 고통스러웠지만, 바로 거기에서 한 순간 그는 눈부신 빛과 찬란한 야성 그리고 그리운 모성을 본다. 그리고 그는 견디기 힘든 강렬한 빛에 눈이 멀어버린다. 일상인인 그에게 그 빛은 가혹할 정도로 찬란했고, 그로 인하여 지금까지 한없이 정답고 친근했던 울타리 안쪽의 사물들이 보이지 않거나 갑자기 낯설어져 버린다. 바깥 세계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그의 청각을 마비시키고 그의 몸과 마음은 알 수 없는 두려운 기쁨으로 출렁이게 했다. 그 때 그는 자신이 쌓아올렸던 울타리는 바깥 세계의 본래성을 차단하는 장애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동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열 수가 없던 그에게 다시 소리가 들려온다. 존재의 음성이다. 그 소리에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본다. 그 순간 번개처럼 명멸하는 놀라운 것이 그의 감성을 스치고 간다. 존재의 눈빛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외친다. “아아, 있다. 저기 있는 그것이...!” 이때 그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울타리를 쌓았던 언어와는 달리 그의 내부에서 오랜 잠의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는 근원적인 언어였다. 그것은 일상 언어에 배반되는 언어로서 울타리 안쪽(문화)에서 보면 반언어(反言語)이지만 그러나 울타리 바깥의 자연에서 보면 오히려 본래적인 언어인 것이다. 마침내 그는 참되게 본 것이고 진실로 본 사람(視人)이 된다. 그리고 이제 그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본래적인 언어(Ursprache)로서 시(詩)이고, 그는 마침내 시인(視人)으로서 시인(詩人)이 된 것이다. 시인이라니... 횔덜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본래 시인이다. 어린아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린아이의 말은 로고스의 논리가 아니라 미토스의 노래이다. 어린아이의 말은 논리의 사슬에 묶이기 전에 신화의 날개로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상(飛翔)의 언어로서 바로 시(詩)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울타리 바깥의 자연과 안쪽의 인간이 화해할 수 있는 대화의 수단은 문화 쪽에서 보면 반언어(反言語)이다. 시인은 반언어로써 일상세계를 배반하고 본래적인 세계인 자연과 소통한다. 일상세계를 배반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근원인 대지에게로의 귀환이며 존재(피지스로서의 자연)와 해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안온한 문화 공간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일상적인 것들은 울타리 바깥의 자연(physis)에서 보면 가상(der Schein)일 뿐이므로 시인의 눈은 그 가상을 벗기고 본질을 열어서 본래적인 현상(das Phänomen)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럴 때 인간은 이제까지 안주해온 문화의 울타리 안쪽에서 존재망각의 긴 잠을 깨고 일어나 참된 눈으로 근원적인 고향 즉 어머니인 대지(자연)를 보게 되는 것이며, 대지와 인간 사이에 놓인 차단의 벽(일상의 울타리)을 헐고 화해의 말 건넴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문화의 울타리를 헐어버린다는 것은 뿌리도 없이 대지에 수직적으로 서 있는 인간에게는 큰 위협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차단의 벽을 뚫고 창을 만들어 이것을 통하여 자연과 소통하려 한다. 이 소통의 창문이 시작(詩作)의 통로이다. 시인은 이 창을 통하여 보고 듣고 시를 쓴다. 그러나 진정한 시인은 그 소통의 창문에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있는 울타리 안쪽의 일상성을 떠나 존재의 눈빛을 찾아 바깥의 본래적인 세계로 나가려고 한다.
일찍이 대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수평적인 대지에 뿌리도 없이 수직으로 서 있어 불안정한 인간, 주어진 언어로 어머니 대지와 소통하지 않고 오히려 차폐의 울타리 벽을 쌓은 인간, 그리고 울타리 안쪽을 개간(cultivate)하여 문화(culture)를 만들고 거기에서 존재 망각의 비본래적인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울타리 바깥의 피지스를 엿보게 되어 존재의 빛과 음성을 듣게 된 인간, 그가 다름 아닌 시인이다. 그런 시인이 다시 일상인(das Man)이 되어 울타리 안쪽의 일상성(Alltaglichkeit)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는 이미 눈이 멀어서 일상세계를 바라볼 시력을 잃고 귀가 멀어서 일상언어를 들을 수 있는 청각을 상실했으며, 그의 언어는 일상인과는 소통할 수 없는 反言語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울타리 안쪽의 일상세계에서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던 그는 철저한 소외와 고독 속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마치 거부할 수 없는 깊고 둔중한 종소리처럼 울려와서 그를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느낌(엑스터시) 속으로 밀어 넣는다. 알 수 없는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느낌! 과연 괴테의 말처럼 느낌이 전부(Gefühl ist alles!)이다. 시인은 그것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친근한 일상의 바깥으로 나가서 잠잘 곳 없는 無宿者가 되어 유랑의 길을 떠난다. 존재의 눈빛을 찾아 집을 떠나서 유랑의 길을 가는 에뜨랑제의 고독, 그것은 시인이 져야할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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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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