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시인의 섬세한 관찰과 전하고픈 메시지는
산문시에서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호흡이 길고 설명적인 묘사가 많아
독자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힘이 셉니다.
그래서 빈 공간을 조금 마련하라는 교수님의 주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야 시가 입체적으로 설 자리가 생긴다고 봅니다.
독자의 고삐까지 다 당겨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씻겨놓은 자상한 솜씨는
독자가 참여할 '창조적 공간'을 빼앗게 되는 역효과를 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박 시인은 꿈 시리즈 詩作에서도 그러했지만
스토리텔링을 시에 접목해 보려는 그런 시도를 여기서도 하셨다고 합니다.
888회 시 토론회 후기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성경적인 말투가 곳곳에 담겨 있어서 시와 신앙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문장이 길면 독자가 혼란스러우니, 단문으로 한두 번 호흡을 정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짚북더미'나 '짚북데기'라는 단어 대신에 "누런 갈색의 북더미"로 바꾸신 것,
북더미라는 단어를 선택하기까지 고심하셨다는 말을 들으니
시를 정치하게 다루려는 시인의 의도를 짐작하게 됩니다.
교수님의 감찰에 걸리지 않으셨으니까 말이지요. ㅎㅎ
"감찰"이라는 용어 역시 성경적이지 않나요??
제목을 <겨울 강변>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말씀
겨울강변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셨으니까요.
'강물', '햇살', '바람', 갈대와 잡풀' 등의 키워드가 '놀이터'라는 말과 연결되기보다는 강변 풍경에 더 닿아 있으므로.(서강님)
"선한 다스림으로 권세를 누린다", "꺾어진 고개를 들기 위해", "대관령 덕장에서 몸을 말리는 북어처럼", "야윌 대로 야윈 채로 여생을 마감하는",
"하염없이 몸을 뒤섞으며 애정을 나눈다", "강변의 만물상", "그 모든 되어진 일의 증인" 등은 시인만이 알고 있는 주관적 비밀이어서 풍경시의 흐름을 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빼곡한 표현이 시 속에 용해되어 시적인 옷을 입으려면
단언하는 말보다 겅중겅중 뛰어 빈공간이 드러나게 하면
독자들이 참여해서 그 여백을 꿰매거나 채울 수 있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장시를 쓰시느라 얼마나 고심하셨을까,
유대인들이 성경구절을 이마에도 손목에도 매고 몸을 끄덕이며 암송하는 그런 모습이 떠올라 조르바는 숙연해졌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