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코'에 대한 선생님의 유추 설명이 참 재미있고 그런 본딧말이 있음에 뜻밖이었습니다. 개코를 개의 코로만 생각해서(강아지의 코를 보면 어릴 적에 입던 오버 단추 같아서 무척 귀여워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었는데 이제 속이 좀 시원해진 느낌입니다.
시어머님께 이 이야기를 해드리면 틀림없이 다른 할머니들께 우리 메누리(며느리)가 그카더라 하시면서 자랑을 하실 것 같네요.
메나리, 산유화에 대한 이야기도 즐겁습니다.
저 나름대로 농요를 최고의 소리, 직접 농사를 지으시며 자신만의 장단과 흥, 시름으로 농요를 부르시는 촌로는 최고의 소리꾼이라고 생각합니다. 흙, 바람, 비와 더불어 지내며 가장 자연에 가까운 토속적인 소리를 하는 분이라 여기니까요.
취미로 경기민요를 공부하며 경토리보다 메나리토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경기민요조의 경쾌하면서도 야질자질한 맛보다는 메나리조의 꿋꿋하면서도 구슬픈 듯한 구성 때문인 듯합니다.(야질자질 -> 이춘희 명창의 표현)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란 책에 보면 부여의 모심는 소리인 산유화가에 대한 설명 중 '산유화'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하며 산유화가의 노랫말 맥락으로 보아 모심기철에 피는 꽃이며, 모심기를 마무리 하면서 부르는 '자진산유화'의 노랫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했네요.
산유화야 산유화야
네 꽃피어 자랑 마라
구십소광 잠깐 간다
어화 어화 상사디여
구십소광은 구십춘광(九十春光)으로 봄의 따스한 볕이 오래가지 못하듯 꽃도 피었다가 곧 지는 운명이란 것을 표현. 짧은 노랫말에 인생살이 만사가 다 들어있는 듯합니다.
'茗禪'에 그런 뜻이 있었군요..
우리나라의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다산과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 님을 빼놓을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공부삼아 검색해보다가 <'시는 언지(言志)'라 하여 자기가 비굴하면 아무리 고상한 언어를 수사해도 시가 될 수 없다>는 구절이 마음에 들어 올려봅니다.
(허락없이 퍼옴)
조선 후기의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시와 선(禪)과 차가 완전히 합일된 경지에서 노닐던 진정한 다인이자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 간 우리 문학과 사상의 거봉이었다.
차를 즐겨 마신 다산은 그가 은거하던 귤동의 뒷산 이름인 '다산(茶山)'을 자신의 호로 쓸 만큼 차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그는 혜장선사 이외에 색성과 자홍 같은 학승과도 깊은 교류를 하였으며, 특히 초의선사와의 자별한 교분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차를 마시고 시를 논하던 다시일여(茶詩一如)와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가 여기서 나왔음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짐작할 만하다. 그는 '시는 언지(言志)'라 하여 자기가 비굴하면 아무리 고상한 언어를 수사해도 시가 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그는 시를 자기수양과 인격의 소양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민중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며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횡포, 그리고 위선과 비리를 고발하는 시를 썼던 것이다.
대실학자이자 해동 제일의 문장이며 또한 추사체를 만들어낸 최고의 명필이기도 한 추사 김정희. 그는 청나라의 대실학자 옹방강(翁方綱)이 '해동 제일의 문장'이라고 칭찬할 정도였으며, 《동다송》의 저자 초의선사나 다산(茶山)과 맺은 인연, 그리고 '동방의 유마거사(維摩居士)'라 불리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시서화선다(詩書畵禪茶)는 물론 학문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또 다른 호인 '경향다로실'은 그가 얼마나 차를 사랑했는가를 말해주기도 한다. 서권기(書券氣)와 문자향(文字香)에 젖어 있던 그의 모습이 한가롭고 그 기품 또한 절로 높기만 하다.
또한 그는 "조용한 가운데 혼자 앉아 차를 마심에 그 향기는 처음과 같고 물은 저절로 흐르고 꽃은 저만치 홀로 피니"라 하였으니 이 경지가 바로 다선삼매(茶禪三昧)가 아니던가. 추사는 또한 많은 다시(茶詩)를 남기기도 했다.
조선 후기 명 다인으로 손꼽히는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는 차를 매개로 시를 논하고 선을 논하며 평생토록 교유를 이어갔다.
차의 맑고 깨끗한 성품을 본받아 곧고 강직하였으며 시와 그림, 차를 즐기는 풍류를 알았던 세 사람.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다도는 그 명맥을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