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고 싶어요
정 정 지
서늘한 날씨에
군자란이
꽃대를 밀어 올리다 멈췄다
뭇 꽃들이
다투어 피어서
존재감을 드러내다 떠나고
벌도 나비도 가버린 지금
너무 늦은 출발이었나
다른 이들이 쉽게 하는 일이라도
어렵거나 안되는 일이 있다
숨이 차게 쫓아가도
따라잡지 못하는 일이 있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올라오던 꽃대를
물고 있는 군자란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지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길이 없다
ㅡ 군자란을 소재로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쓴 시라고 봅니다. 시인의 마음은 돌아가고 싶다는 것. 너무 늦은 출발이 아니었나 하는 걱정.
나이 듦이라는 현실이 시인을 힘들게, 낙담하게 하는 면이 있다는 의미일 듯.
돌아간다는 것은 귀향, 본래로의 회귀, 수구지심(首丘之心) 등의 의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군자란을 통해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성찰적 얘기를 하고 계신데요...
하지만 밑줄 부분들이 “시적 언어”로 “그려지기”보다는 분석적이고 설명적인 언어로 나타나 있어
감정이입이 약화되는 느낌입니다.(서강님 외 다수가 그런 의견)
ㅡ "출발한 지점"이라는 설명적 언어는 (특정) 장소를 뜻하는 의미여서 그것보다는 어떤 상황(?)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말씀(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용어를 다르게 써서 '처음'을 뜻하는 보다 근원적인 울림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셨습니다.
1연) 서늘한 날(에)/ 군자란이/ 꽃대를 밀어 올리다 멈췄다
2연) 뭇 꽃 다투어 피었다 떠나고/ 벌도 나비도 가버린 지금
3연)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올라오던(는) 꽃대를/ 물고 있는 군자란
4연) 그 다음에 “너무 늦은 출발이었나”의 3연과 4연을 여기다 수정하여 올리면 어떨까 하는 의견.
6연) “출발한 지점”을 꽃의 “잉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시거나,
→→ ‘돌아갈 수 없어/ 동그마니 앉아 있는 군자란/ 긴 그림자 끌고 있다’라거나(교수님),
ㅡ ‘계절의 고개를 넘어’ (+한두 행+~~~)/ 따뜻한 날을 숨죽여 기다리겠다(서강님)
이런 마무리가 어떨까 하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ㅡ 시의 마지막 행이 “돌아가는 길이 없다”라고 단정해 버리면 이건 내뱉는 말일 뿐........
여운이나 울림이 오지 않고, 부정적인(암울한) 말을 뱉어내는 느낌. 단절된 시각을 보여주므로(조르바)
군자란이란 말처럼 덕스럽고 점잖고 품위 있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듯.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군자란 꽃대의 모습을 여전히 그러한, 진행되는 어떤 상태의 이미지로 제시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
“때늦은 출발”이라면... 좀 더 늦게까지 피어 있을 수 있겠다는 기대 혹은 망설임 끝에 단 한 번 피기 위해 오랜 진통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조르바의 생각을 덧붙입니다.
교수님의 지론대로 이해하자면 “시는 대상과 주체를 연결하는 고리”라는 말씀.
“그 고리를 통하여 대상은 주체에게 주체는 대상에게
서로의 존재를 드러내고 합일하는 것”이 시라는 말씀인 듯합니다.
노란 감옥
전 영 숙
윗지방에는 서리가 내렸다 합니다
소복이 핀 노란 소국이 모여 있어도 추워 보입니다
꿀벌의 가열 찬 날갯짓과 날개를 펼쳐 꽃송이를
덮고 있는 나비가 온기를 보태고 있는 듯합니다
햇볕과 바람은 말리는 일로 돌아선 지 오래입니다
더 춥기 전에 떨어져야 하는데
점점 미라화 되어 떨어지지도 못합니다
피는 것보다 지는 게 더 오래 걸리는 작은 나라
노란 감옥에 갇혀 긴 시간 흔들리고 있습니다
ㅡ <노란 감옥>이라는 제목에 호기심과 신선도를 느낍니다. 꽃 자체가 감옥이라는 말.
교수님께서 <꽃의 시적 대상성>이라는 교수님 논문을 요약, 말씀해 주셨는데요........
살짝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꽃은 순수한 사물로서 미적 대상이다.
꽃이 우리에게 이미지로 대상화된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경험되어 하나의 의식현상이 된다는 뜻. 이러한 의식 현상을 서술하고 서술 뒤에 환원을 통하여 남는 것이 현상학적 잔여로서 우리의 목표가 된다. 그런데 환원이란 ‘의미 부여’이고 세계란 ‘의미로서의 세계’이므로 꽃의 대상성은 다시 역설적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의미가 될 수밖에 없다.
꽃의 특이한 대상성을 세 가지로 구분해 드러내고자 한다고 하시면서...
1) 진리의 개시성
꽃은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이므로 본래성 그대로를 드러낸다(비은폐성).
그런데 진리란 존재자의 존재의 드러남이다. 그리고 <예술의 본질은 존재자의 진리의 작품 가운데로의 자기 정립>이고, <예술작품은 자신의 독자적 방식으로 존재자의 존재를 개시한다.> 시는 예술작품이고 따라서 시는 존재를 개시하는데 그것은 곧 진리를 의미한다. 꽃이 스스로를 순수하게 드러내는 사물이고, 또한 시(예술)가 존재를 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시(예술)는 도구적 사물보다는 그것의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꽃에 우선적으로 쉽게 지향해 나간다. 그러므로 꽃은 진리의 개시(존재의 드러냄)의 가장 손쉬운 표상의 하나로, 시의 대상으로 자주 등장한다.
2) 비효용성
꽃은 관조의 대상, 순수하게 우리 앞에 그 본질을 드러내 보여 준다. 비효용성으로 미적 대상(유희 대상)이 된다. 대상은 있는 바 그대로의 것.
3) 즉자─대자(for-itself─in-itself) 종합의 표상
시는 <의식과 대상 사이, 인간과 세계 사이를 원초적으로 맺어준다. [...] 시 속의 낱말과 문장들은 의식의 눈 앞에 대상을 객관적으로 나타내거나 표상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의 기능은 가능한 한 인간과 세계, 즉자와 대자, 곧 대상과 그것의 개념 가운데 가로놓인 존재론적 전망과 의미론적 조망 사이의 틈을 좁히고 메꾸는 일이다.> 달리 말해 시는 인간과 사물, 대자와 즉자를 연결하는 고리로서 인간과 사물과의 간격을 없애준다.
이러한 내용은 이전에도 말씀하셨고 또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시에서 이를 제대로 소화 못하는 면이 많죠?
꽃의 외형 그 자체는 꽃이 아니다. 꽃 그 자체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다. 꽃의 드러난 형태를 추정해서 생각할 뿐. 꽃이 살고 있는 그릇(거소)이 꽃의 감옥이라는 뜻.
ㅡ 서리가 내렸다는 것으로 봐서 때는 10월 말, 상강 즈음인가 봅니다. 그러나 남부지방에서는 꿀벌이나 나비가 보이기도 합니다.
“꽃송이를 덮고 있는 나비가 온기를 보태”는 듯하다는 시인의 표현에 그 따뜻한 시각과 정서에 공감하는 동인이 많았습니다.(해안님, 목련님 등)
ㅡ “가열차다”라는 어휘가 표준어로는 “가열하다”라면, 표준어를 굳이 써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 시에서는 지역어를 살려야 할 별다른 이유는 없으므로 '가열한'으로 쓰면 좋을 듯?
“~~~지”가 기간이면 의존명사로 봐서 띄웁니다.
그를 만난 지(가) 오래되었다. / 그가 잠자리에 든 지(는) 열 시간이 넘었다.
일이 되는지 안 되는지 궁금하다. / 꾸물대고만 있으니 갈 요량인지 안 갈 요량인지 알 수가 없다.
ㅡ 노란 소국이 무리지어 피었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꽃이 시들어 가는 것과는 달리, 이 소국은 그러지를 못하고 피어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마르는 모습에
시인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꽃이 져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핀 채로 말라가는 모습을 "노란 감옥"이라 했나 봅니다.
인생이라는 감옥 안에서 갇힌 줄도 모르고 사는 우리 인생을 빗대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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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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