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1. “옆”이라는 홑 단어가 왠지 허전해 보인다는 조르바의 발언.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것은 ‘자리’라는 공간보다 ‘거리’ 개념과 어울리지 않겠나 하는 발언.
하오나 교수님께서는
<옆>이라는 한 단어 제목이 충분히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하십니다.^^
앞도, 위도, 뒤도 아니고
옆이라는 공간은 도와주는 자리, 간접적인 자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앞에서는 끌어주고, 뒤에서는 밀고, 위에서는 잡아당길 수 있지만, 옆에서는 그저 지켜보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조력의 공간일 수 있다는 설명.
이를 확장시켜 교수님께서는 동양의 철인들이 알고 있던 ‘시간과 공간과 언어’, 이 세 가지 영역이 결국 인간의 삶 전부를 결정하는 문제라고 하십니다.(이건 송항룡 선생님께서 <노자> 운운하실 때의 말씀이셔서 조르바는 들어도 계속 모르는 상태입니다. ㅜㅜ)
어쨌거나 하이디님의 시세계는
이런 문제를 건드릴 만큼 넓고 깊다는 뜻일 테지요.^^
즉, 첫 행에서처럼 “모란꽃이 지고 있”음을 통해 끝까지 말해야 하는 뭔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상관물은 어디까지나 ‘모란’이므로 모란으로써 처음과 끝이 시적 통일성을 갖고 표현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교수님께서 하셨습니다.
2. “한 줄 한 줄 쌓아올린/ 허공의 꽃”이라는 부분에서는 ‘쌓아올린다’(적층)는 개념과 ‘한 줄씩’이라는 의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한 켜 한 켜’라거나 더 적절한 용어를 생각하셔야 할 듯합니다.
3. “산산조각이 난/ 맑은 눈빛과 둥글고 큰 웃음”
이 부분에서 조르바는 행의 순서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시간 혹은 순서상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관계에서 수식어 때문에 피수식어의 범위가 자유롭지 못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눈빛과 웃음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있고 또 그것을 앞 행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하니
머리 위에 무언가를 잔뜩 이고 있어
독자는 화자와의 소통에 힘겨운 느낌을 받습니다.
조르바에게는 하이디님의 시가 섬세하면서도 막연하게 느껴지는 이유라고 말해도 될까요?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하는 울음” 역시 이중적인 수식어(꾀꼬리, 울지도 못하는) 때문에 ‘울음’이 제 의미를 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홑으로 펴 줄 수 없는 겹겹”의 의미도 조금은 막연했습니다.
결국 “겹(이중)”을 말하기 위해 수식어를 또 한 번 달아놓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교수님은 이를 ‘한 겹’을 뜻하는 ‘홑겹’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이 ‘겹겹’이라는 말의 대척어가 될까 하는 의문을 나타내셨습니다.
(T그룹 통화의 품질이 좋지 않아, 이때쯤부터 조르바는 두통과 잡음 때문에 그냥 사라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폰 통화가 제 청력과 뇌신경에는 몹시 불편, ㅠㅠㅠ)
3. “가깝다는 말의 옆이 흩어진다”라고 표현한 것은
소통하기 힘든 혼자 떨어진 세계를 의미하신 것 같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가벼워지는 꽃”은 꽃의 소임을 다하고 나서 자유와 해방의 시간을 찾아가는 꽃의 생리일 텐데
이를 바라보는 화자는 “오후가 간당간당하다”고 말함으로써
무언가에 불안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모란이 지고 있다”라는 첫 행의 객관적이고 명시적인 장면이
(예전에 피어난 웃음이)
점차 “물건이 떨어지듯” 떨어지고
웃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울음으로도 울지 못하고
(가깝다고 느끼던 공간에서) 흩어지고 결국 가벼워져서 소멸하게 된다는 의미를 전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
그래서 그것을 지켜보는 화자는
마치 생명이 위태한 것처럼 불안한 느낌을 전하기 위해
그러한 오후를 “간당간당하다”라고 표현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