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에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고 하던데요,
전 이런 글이 실린 것을 기억 못하니,
아마 수업시간에 졸았거나 땡땡이 치고 수업을 빠졌거나 그랬을까요??
물빛의 거장이신 두 분의 정여사님들께서는 기억하시는지요?
박용철의 시론 중 「시적 변용에 대하여」(『삼천리 문학』, 1938.)
그는 “우리의 모든 체험은 피 가운데로 용해한다”고 말한다. 즉 “피 가운데로, 피 가운데로, 한낱 감각과, 한 가지 구경과, 구름같이 떠올랐던 생각과, 한 근육의 움직임과, 읽은 시 한 줄, 지나간 격정이 모두 피 가운데 알아보기 어려운 용해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는 보통 생각하는 것같이 단순히 애정이 아닌 것이다. 시는 체험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체험만으로 시는 되지 않는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긴 생애를 두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의미와 감미(甘味)를 모으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의미와 감미를 모은다는 것은 박용철에게는 기억의 행위이다. “모르는 지방의 길, 뜻하지 않았던 만남, 오래 전부터 생각하던 이별” 등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이런 기억의 행위는 곧 한 편의 시를 완성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러 밤의 사랑의 기억, 진통하는 여자의 부르짖음과 아이를 낳고 해쓱하게 잠든 여자의 기억”들이 시인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억이 많아진 때 기억을 잊어버릴 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말할 수 없는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기억만으로는 시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들이 우리 속에 피가 되고 눈짓과 몸가짐이 되고 우리 자신과 구별할 수 없는 이름 없는 것이 된 다음이라야” 한 줄의 시가 만들어진다. 즉, 기억이 기다림을 통하여 나와 일체가 될 때 시가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열 줄의 좋은 시를 다만 기다리고 일생을 보낸다면 한 줄의 좋은 시도 쓰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좋은 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한한 고난과 수련의 길을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용철은 “시인은 진실로 우리 가운데서 자라난 한 포기 나무이다.”라고 말한다. 즉 시인이 “뿌리를 땅에 박고 광야에 서서 대기를 호흡하는 나무로 서 있을 때만 그의 가지에서는 생명의 꽃이 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꽃을 피우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래서 박용철은 시인을 두고 “비상한 고심과 노력이 아니고는 그 생활의 정을 모아 표현의 꽃을 피게 하지 못하는 비극을 가진 식물이다”라고 말한다.
박용철은 시를 쓰는 과정의 구체화와 함께 시인의 자질됨을 이야기 하고 있다. 박용철에게 시는 시인의 자기완성이다. 시는 곧 시인의 삶 자체이자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독일의 시인 릴케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먼저 쓴다는 것이 네 심령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일인가를 살펴보라. 그리고 밤과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네 스스로 물어보라 - 그 글을 쓰지 않으면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그런 내심의 요구가 있다면 그때 너는 네 생애를 이 필연성에 의해서 건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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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못지 않게 시를 쓰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쓴 글은 아니고, 요점만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