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부상한 새로운 일군의 시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들은 어떤 미학을 구현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삶을 형상화하고 있는가? 이들이 소개한 새로운 어법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짧은 글은, 그런 여러 질문에 대한 개괄적인 안내를 의도하고 있다. 이들의 시를 정의하는 몇 개의 키워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이들 시에 접근하는 우회로를 확보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 우회의 끝에서, 키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강조해야 할 것이 있다. 이들의 시를 일군의 특징으로 묶지 말고, 먼저 개별적인 성과의 집적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어떤 특징이 드러날 수는 있겠지만, 늘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편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한 교집합이 아니라, 그 공통성 이후에 발견되는 여집합들이다. 이들이 지금의 시와 다른 무엇을 <각자> 보여주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지, 새로운 무엇을 <함께> 보여주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미래적>이라는 수식어는 그래서 늘 진행형이어야 한다. 그것은 완성형이 아니다.
1. 환상? 새로운 시들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흔히 이야기되는 것이 환상성이다. 최근의 시들에는 비사실적인 진술이 전면에 드러나 있으며, 이를 통해 이들 시인들이 사실주의 문학에서 누리지 못했던 정신의 자유를 그 극한까지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이들 시에 대한 비판의 논거이기도 하다. 환상의 극단적 추구는 만연한 개인주의의 징후이며(이들은 공동선 따위에 관심이 없다), 쇄말의 표상이며(이들은 독자의 공감을 차단한다), 조작의 증거다(환상의 표현은 이들 누구에게나 엇비슷하다). 마지막 주장이 다른 주장의 논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어서 이름을 가리면 누군지 알 수 없는 환상이 범람한다는 것이다. 이런 환상이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그 저변에 깔렸다. 내 생각은 다르다. 환상적인 표현이 두루 보인다고 해서 환상의 내용까지 같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들의 시가 환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추측과 비교와 설명을 단순한 현재시제로 처리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들은 자주 와 같은 구문을 로 통일해서 서술한다. 그만큼 시는 단순해졌지만, 대신에 풍부한 함의를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