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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01 19:23

2013년도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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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신춘문예 당선작

<동아일보>

1. 시

가난한 오늘 
- 이병국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심사평
장석주, 장석남 시인

통념을 깨는 상징을 찾아라, 감각의 명증성을 보여라, 생명의 도약에 공감하라, 세계의 찰나를 경이로써 보여주라. 좋은 시의 덕목으로 꼽을만한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껍질을 깨라! 도약하는 힘을 보여라! 마치 “알맹이의 과잉에 못 이겨 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이 그렇듯이. “제가 발견한 것들의 힘에 겨워 파열”하고, 사물의 새로움과 내면의 고매함을 융합하며 붉은 보석이 밖으로 터져 나온다.(발레리, 「석류들」) 상상력은 늘 그렇게 독자를 익숙한 것들에 대한 놀라운 개안(開眼)으로 이끈다.

「이모의 가까운 해변」「골목을 들어올리는 것들」「향리의 저녁 일지」「발의 원주율」「어제의 인사」「끌어안는 손」「오늘 너의 이름은 눈」「친구들」「가난한 오늘」「迷路庭園」「밀의 기원」「꽃 앞의 계절」 등을 최종심에서 읽었는데, 그것은 개성과 환유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속에서 무르익어 스스로 내면을 깨고 터져 나오는 시를 찾는 일이다. 익숙한 서정을 찾기 힘든 대신에 낯선 감각과 의도된 착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흐름은 주목할 만했다. 우리는 서너 편의 시를 손에 쥐고 오래 망설였다.

「가난한 오늘」을 두 시간이 훌쩍 넘는 고심 끝에 골랐다. 신체 말단이 잘리고 헐고 바랜 자는 상처 받은 자이고, 그 상처는 가난의 흔적일 것이다. 일체 엄살이 없다. 아픔을 과시하는 헤풂을 절제하고 가난에 형상을 부여하는 힘은 정신의 야무짐에서 나온다. 싯구와 싯구 사이에 여백이 그 시적 물증이다. 수사가 덜 화사하고 주제가 소박했지만 아픔과 미망에 대한 표현의 간결함에서 사물에 감응하는 시인의 정직과 내핍의 염결성을 느꼈고, 그것에 깊이 공감했다. 이 시인의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게 분명하다. 지금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가난한 오늘」을 당선작으로 뽑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2. 시조

꽃씨, 날아가다  
- 조은덕


바람이 날라다 준 햇살 한 줌 끌어안고
손가락 굵기만큼 동글 납작 눕히는 무
어머니, 물기 밴 시간 꼬들꼬들 말라 간다

짓무를라, 떼어 내고 뒤집어서 옮겨 놓는
뒤틀린 세월들을 하나 둘씩 펼쳐본다
여름이 남기고 간 속살 광주리에 가득하다

맵고 짠 눈물 섞어 켜켜이 눌러 담은
어둠 속에 숨 고르는 울혈의 무말랭이
주름진 생을 삭힌다, 아린 손끝 붉어온다

돌아가는 모퉁이길 얼비치는 맑은 아침
마른 뼈 꽉 움켜 쥔 말간 핏줄 여울목에
어머니 가벼워진 몸, 꽃씨 되어 날아간다

심사평
한분순,민병도 시조시인

근년 들어 신춘문예에 응모된 작품의 대체적인 경향은 표현주의적 색채로 쏠린다는 점일 것이다. 표현이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이니 아직 원숙미가 부족한 신인들이라면 의당 여기에 치중하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 그쳐야 한다. 양념이나 조미료에 의존하는 한 재료 고유의 맛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으로 민승희의 「황소」, 유외순의 「인각사에서」, 조은덕의 「꽃씨, 날아가다」 등 세 편이 남았다. 이 작품들은 각각의 장점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인각사에서」는 역사적 소재가 지닌 창의성의 한계로 인해 순위에서 밀려나고 「황소」와 「꽃씨, 날아가다」를 두고는 장고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력과 사유, 감각적인 시어 선택, 상상력의 깊이 등 두 사람 모두 오랜 시력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소」는 선짓국을 뜨면서 황소의 존재를 떠올리고 흡사하게 살다간 아버지의 삶을 읽어내는 상상력의 깊이가 돋보였으나 시선이 과거의 반추에 멈춰버린 아쉬움이 남았다. 그에 비해 「꽃씨, 날아가다」는 무말랭이를 만드는 체험과정에서 발견해 가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시조 특유의 양식적 긴장미와 맞물려 공감의 진폭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의 높은 완성도 또한 신뢰를 견인하였음을 밝혀두며 개성미가 넘치는 작품으로 시조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켜 주길 기대한다.

<조선일보>

1. 시조

극야의 새벽
김재길


얼붙은 칠흑 새벽 빗발 선 별자리들
붉은 피 묻어나는 눈보라에 몸을 묻고
연착된 열차 기다리며 지평선에 잠든다.
황도(黃道)의 뼈를 따라 하늘길이 결빙된다
오로라 황록 꽃은 어디쯤에 피는 걸까
사람도 그 시간 속엔 낡아빠진 문명일 뿐.
난산하는 포유류들 사납게 울부짖고
새들의 언 날개가 분분히 부서진다
빙하가 두꺼워지다 찬 생살이 터질 때.
제 눈알 갉아먹으며 벌레가 눈을 뜬다
우주의 모서리를 바퀴로 굴리면서
한 줌의 빛을 들고서 연금술사가 찾아온다.
황천의 검은 장막 활짝 걷고 문 열어라
무저갱 깊은 바닥 쿵쿵쿵 쿵 울리면서
안맹이 번쩍 눈 뜨듯 부활하라 새벽이여.


*극야: 밤만 계속되는 시간을 말함. ‘백야’의 반대 현상

김재길
[시조 당선소감] "시조를 향한 도전… 최전방으로 날아온 당선의 기쁨"

극야의 새벽 같은 시간에 따뜻한 여명의 빛 한줄기가 강원도 최전방의 초병에게로 날아왔습니다. 20살의 어린 나이에 처음 시작해본 것은 경남대학교 청년작가아카데미에서 시조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언가에 도전하려 하는 청춘의 자그마한 불꽃이었습니다. 모두가 저에게 랭보를 꿈꾸어야 할 청춘의 시간에 시가 아닌 시조를 쓴다고 의아해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늘 제 마음을 사로잡은 시조는 율(律)로서 완성된다고 굳게 믿고 제 발자국을 정법으로 삼아 또박또박 헤아리며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지독한 필사의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묘사와 은유의 공간에서 늘 회초리로 저를 때리며 살아왔습니다. 여름과 겨울마다 하동 평사리에서 가진 지옥훈련 같았던 창작교실이 지금의 저를 키웠습니다. 지금껏 시인들의 하늘을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가깝게만 느껴졌던 그 하늘이 이렇게 멀 줄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야흐로 운명의 폭발이 시작되었나 봅니다. 이제 스스로 운문의 하늘을 밝히는 초신성이 되었습니다. 청년작가아카데미 교수님들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빛을 머금은 원석’이라고 저를 소개했습니다. 이제 그 꿈만 같던 빛을 손아귀에 쥐었습니다.

이제 스스로를 더욱 세공하여 늘 정상에서 환하게 빛나는 보석이 되겠습니다. 따뜻한 바다 통영에 계신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존경하는 김정대, 정일근 교수님과 청년작가아카데미에 이 영광을 모두 돌리겠습니다. 이름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조선일보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1991년 경남 통영 출생
▲경남대 국문과 3년 휴학.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 1기 수료
▲현재 육군 7사단 일병으로 현역 복무 중

정수자·시조 시인
[시조 심사평] 거침없는 상상력과 활달한 호흡으로 시적 지평 넓혀

‘약관’은 한때 신춘문예의 단골 수식어였다. 그 약관의 관을 얹어 한 시인을 내보낸다. 그의 이름은 김재길, 보무도 당당한 대한민국의 육군 일병이다. 스물을 갓 넘긴 청년의 야심 찬 걸음이 ‘쿵쿵쿵 쿵’ 지축을 울리는 듯하다.

응모작에는 충혈의 눈빛이 비치는 게 많았다. 끝까지 들었다 놓았다 한 것은 이윤훈·이병철·장윤정·하양수·송인영씨였다. 정형시로서의 미학적 완성도나 호흡의 안정감, 현실적 맥락을 잃지 않는 감각과 발상, 형식에 함몰되지 않는 신선한 긴장감 등에서 남다른 공력의 시간이 보였다.

반가운 것은 공소한 관념이나 낡은 서정이 아닌 오늘 이곳의 살아 있는 삶을 정형(定型) 안에 다듬어 앉히면서 자신의 목소리도 펼쳐낸다는 점이다. 시조에 대한 편견을 날려줄 작품이 늘고 있어 다음을 기대하게 한다.

당선자는 그중에도 가장 헌걸찬 형상력과 보폭을 보여준다. ‘오로라’, ‘우주의 모서리’, ‘무저갱’까지 거침없이 오르내리는 상상력과 활달한 호흡으로 ‘새벽’의 시적 지평을 한층 넓히는 것이다. 낯설고 분방한 그래서 더 역동적인 비유와 이미지들은 정형의 율격을 시원하게 타 넘으며 보기 드문 대륙적 약동을 뿜는다. 이 모두 당선작을 기꺼이 들어 올리게 한 패기와 가능성이다. 하지만 다른 작품에서 비치는 기술의 과잉 같은 느낌은 주의를 요한다.

2. 시

손톱 깎는 날
김재현


우주는 뒷덜미만이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처럼 구름은 흩어져 있다
기상청은 거짓, 오늘
나는 천 원짜리 손톱깎이 하나를 살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손톱은 단단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나의 바깥이었다
어릴 적부터 손톱에 관해선
그것을 잘라내는 법만을 배웠다
화초를 몸처럼 기르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지만
나는 손톱에 물을 주거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일 따위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은 문제아거나 모범생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모범이었으며 문제였을 뿐
그러므로 손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나 또한 그것의 바깥에 불과하다

오늘, 우주의 뒷덜미가 내내 환하다
당신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덮으려 하고 나는 손톱을 깎는다
우리는 예의를 위해 버리고, 욕망을 위해 남기지만
동시에 손가락 위에 두껍게 자라는 것들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 수 없다
다만 휴지 속으로 던져둔 손톱들과, 날씨
그리고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버려진 손톱들은 언제나 희미하게 웃고 있다


[당선 소감] "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자꾸만 새로워지겠습니다"
김재현

찌개가 끓고 있는 밥집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텅텅 비어 있던 배 속이 밥알 대신 알 수 없는 감정들로 차올랐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를 수가 있구나. 우습지만, 당선 연락을 받고 처음 깨달은 게 그것입니다. 연락을 받은 친구들이 달려와 볼에다 마구 뽀뽀를 해댔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고 금세 두려움이 차올랐습니다. 제가 그동안 무엇을 써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첫 전장에 나가는 병사의 심정이 이랬을까요.

시인이 된다는 것과 시인이 되고 싶은 것 사이에 이토록 깊은 거리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간밤의 꿈에서 누군가에게 사과를 했고 그는 받아주지 않고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가 시였을까요.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아직 텅 비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은, 시 쓰기에 방점을 찍는다는 생각으로 투고했던 글이었습니다. 그 방점이 새로운 문장을 쓰기 위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놓으면 온다는 이치를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이 길을 숙명이라 믿고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제 가능성을 봐주신 심사위원분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부끄럽지 않게 써나가겠습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셨던 박주택 선생님, 김종회 선생님, 서하진 선생님. 평생을 다해도 갚을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처음으로 시의 길을 알려주셨던 정우영 선생님.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격려와 확신을 주었던 이체, 강진, 동운. 주모동의 단테. 문예창작단의 선후배들. 당신들이 제게는 써야 하는 이유들이었습니다. 고향 친구들인 용준, 한상, 지홍, 경록, 정훈. 내일도 오늘처럼 끈끈하게 살아갑시다. 지금은 이름을 부르기 힘든, 하지만 언젠가 나를 용서해주길 바라는 그에게도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절망과 방황을, 성장과 배움을 당신을 통해 겪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를 나 자신보다 아껴주는 금희와 부모님에게 진심을 담은 사랑을 전합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갓 태어난 기분입니다. 집에 돌아가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자꾸만 새로워지겠습니다.

▲1989년 경남 거창 출생
▲경희대 국문과 재학 중

[심사평]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 돋보여
조정권(왼쪽), 문정희 시인.

어느 해보다 많은 응모작을 보며 새롭고 다양한 개성과 시세계에 대한 기대 또한 더욱 높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시 가운데 이소연의 ‘활과 무사’ 외, 노정균의 ‘우산은 어디서 파나요?’ 외, 김재현의 ‘손톱 깎는 날’ 외로 의견이 좁혀졌다. 이 세 사람의 작품은 우선 언어 장인으로서의 기량과 그것을 삶의 지렛대로 끌고 가려는 진정성이 돋보였다. 최근 한국시에서 자주 지적되는 산문화, 언어 낭비, 소통의 문제도 비교적 잘 극복해 가고 있었다.

이소연은 ‘활과 무사’ ‘늑골이 빛나는 발레 교습’ 등의 작품을 통하여 감각적 투시, 대담한 언어 구사로 산뜻함을 드러내었고, 노정균은 ‘우산은 어디서 파나요?’와 ‘입양’을 통하여 우리말의 어미를 “…다.”로 끝내지 않고 이어지는 각운을 통하여 사유가 리듬을 불러오는 작법의 시도를 보여주었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김재현의 ‘손톱 깎는 날’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과 밀도를 주목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 또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신뢰를 보탰다. 뱀처럼 섬뜩한 이미지의 ‘아야와스키의 시간’, 태어날 것들을 위해 스스로를 앓아 주렁주렁 매달린 ‘몰식자(沒食子)’에서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보았다. 하지만 미개척지를 향한 탐색과 언어 실험자로서의 패기가 지나쳐서 억지스러운 조어가 이물(異物)처럼 박혀 있는 것이 다소 눈에 거슬렸다. 시란 사물과 사유를 언어로 갈고 닦아 가장 명징하게 본질을 드러내는 생명체이다. 삶의 타성과 시류와 진부에로의 수압을 잘 견뎌내어 부디 좋은 시인으로 훨훨 날아오르기를 바란다.

3. 동시

아빠의 공책
김유석


공책 한 권 달랑 들고
들판학교 다니는 우리 아빠
빽빽이 썼다가 지우고
이듬해 봄부터 다시 쓰는
그래도 너널거리지 않는
울 아빠 파란 공책에는
찰랑찰랑 벼 포기들이 넘실거려요
맞춤법이 조금씩 틀린 벌레소리 들리고
할아버지 닮은
염소도 한 마리 묶여 있어요.
똑 똑 똑
땀방울 말줄임표를 따라가면
하늘이 내려와 밑줄을 긋는 지평선 위에
따뜻한 내 옷이랑 새 운동화가 놓여 있지요.

흰 눈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내서
아무도 모르는 줄 알지만
너무 꾹꾹 눌러 써서
뒷장에 남은 자국을
겨울이면
기러기들과 함께 나는 읽지요.


김유석
[동시 당선소감] "이성 사이 뭉클한 감성… 풋풋한 동심의 소리 적었다"

“좋은 시는 동시를 닮았다.”

그렇습니까? 시를 쓰면서, 흙냄새 나는 자연 속에서 사람 사는 일들의 비유와 상징을 긷다 보면 이성의 이랑 사이로 촉을 내미는 뭉클한 감성들이 있습니다. 여리고 풋풋한 것들, 딴엔 반지레한 도깨비바늘 풀씨 같은 것들이 머리가 여럿 달린 사유의 바짓가랑이에 묻어나곤 합니다. 아슴한 유년에서부터 폐교된 들판 운동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이곳을 들러 갔지만 아직 더 많이 남아 자생해가는 것들, 길섶 강아지풀이나 눈밭에 찍힌 너구리 발자국을 따르다 보면 이명처럼 들려오는 노는 아이들 소리 그것을 적었습니다.

어쩌면 몇몇 남아 있는 시골 아이들보다 방학 때 한 차례씩 다녀가는 도회지 아이들에게서 더 절실할 자연, 어른들의 생각과 어른들의 느낌으로 쓰여지고 읽히기 쉬운 생물들의 모습을 동시를 닮고 싶은 욕심으로 적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마른 풀잎들이며 발목이 붉은 기러기들, 추운 모습으로 겨울 들판을 지키는 모든 것이 기뻐할 듯싶습니다. 쉬 눈에 밟히지 않는 작고 무르고 외딸은 것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하루 들길을 걸었습니다. 서툴고 어줍은 글을 심사해주신 선생님께 깊은 절 올립니다. 늘 저만치 안동해 주는 사람, 쿨럭 거리는 동인들, 그리고 “내 친구가 시인이야” 하고 어깨에 힘주는(?) 친구들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더 남은 가슴은 지금도 종종 머리 센 아들을 “아가”라 부르는 노모의 잠을 솜이불처럼 덮어 드려야겠습니다.

▲1960년 전북 김제 출생
▲전북대 문리대
▲1989년 전북일보,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각각 시 당선

[동시 심사평] 말줄임표를 땀방울에 비유한 동화적 상상력 돋보여
이준관(시인, 아동문학가)

국민의 문학 축제라 부를 만큼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많은 작품을 보내왔다. 작품마다 소박하고 진솔한 동심이 담겨 있어 기뻤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전반적으로 생생한 동심의 체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나 오늘날 아이들의 현실과 애환을 담은 작품이 드물다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심수철, 최인숙, 황경순, 하미경, 박대성, 김경련, 김유석이 남았다. 심수철의 ‘내 마음도 토란잎처럼’은 비유가 적절했지만 너무 평범했다. 최인숙의 ‘필리핀 벼룩시장’은 결말은 괜찮았으나 시상이 단조로웠다. 황경순의 ‘무당벌레’는 발상은 좋았으나 소품이었다. 하미경의 ‘밥통 속 아줌마’는 참신했지만 내용이 약했다. 박대성의 ‘나무가 말해 주는 걸’은 시적 표현과 언어 구사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성인의식이 두드러진 것이 흠이었다. 김경련의 ‘풍경 소리’는 동시를 오랫동안 쓰고 수련한 공력이 엿보여 미더웠다. 생활 주변의 소재를 동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잔잔한 여운으로 그려내고 있으나 기존 동시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흔한 소재와 표현이어서 뚜렷한 개성이 부족했다. 그에 비하면 김유석의 ‘아빠의 공책’은 동화적 상상력과 참신한 비유의 독창성이 돋보였다. 아빠의 농사를 공책에 비유하여 벼가 자라는 들판에서 말줄임표처럼 말없이 땀방울을 흘려 아이의 옷과 운동화를 마련해 준다는 이야기를 신선한 시적 표현과 상상력으로 담아낸 역량이 미더웠다. 흔한 소재를 자신만의 이미지로 새롭게 표현해 낸 독창적인 발상과 상상력이 앞으로 개성이 뚜렷한 동시를 쓰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한국일보>

1. 시

쏘가리, 호랑이
이정훈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i]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ii]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거,리,기,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
沼와 여울, 여울과 沼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i]'절벽'이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ii] '골짜기'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당선소감

"세 번 도리질했는데… 두 아이 이름 적어놓고 또 밤길을 줄여갑니다"

세상의 하고많은 배역 중
왜 제게는 나귀 한 마리와
끝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주어졌는지

밤마다 손바닥을 들여다봅니다
후벼서 미안하다는 듯 흐르는 이 강을
오늘은 애수라고 불러봅니다
내가 강가에 마을 하나 지어 놓으면
밤나무 두 그루와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떠갑니다
뇌운 용항 도돈 판운 멀리 주천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여울 가 삐익 삑,
노루새끼 호드기 붑니다

고지를 받았을 땐 지실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아니요, 세 번 도리질 했는데
네 번 맞다고 해서 박달재를 넘을 땐
말씀으로 수태한 처녀 같았습니다
딱!
밤톨 떨어지는 소리가 만종처럼 울려
다릿재 꼭대기 노을을 몰고 시속 팔십 킬로미터
붕붕 서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립고 고마운 이름이 왜 없겠습니까만
나경 해오니 두 아이의 이름 울금빛으로 적어놓고
또 밤길을 줄여야합니다

고형렬 선생님, 감사합니다

심사평
독특한 개성의 탄생…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 보는 듯

세 명의 심사위원이 투고작 전부를 나눠 읽고 거기서 추린 작품을 토대로 논의를 거듭한 결과 '쏘가리, 호랑이'(이정훈)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쏘가리, 호랑이'를 비롯해 이정훈의 작품은 요즘 우리 시단에서 보기 힘든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를 보여준다. 그 상상력은 강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산맥을 치달리는 호랑이로 치환시키는 마법을 가능케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향토적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시는 마치 이 땅에 산업사회가 도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언어의 구체성과 밀도를 획득하고 있다. 이 독특한 개성의 탄생을 축하하며 다만 그의 시편들에 내포된 일종의 아나크로니즘(의도적인 시대착오성)을 앞으로의 시작을 통해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모색해주길 바란다는 권고를 덧붙이고 싶다.

'단풍나무 빵집'의 손현승은 심사위원들에게 오랜 망설임의 시간을 강요한 응모자였다. 대화체를 적절히 활용한 이 시는 대상이 되는 빵-빵집-빵집 여자에 범용한 일상성을 뛰어넘는 서정적 후광을 씌워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따스하면서도 원숙한 시선이 인상적인 이 시는 읽다보면 고소한 빵냄새가 주변에 감도는 듯한 풍미를 선사한다. 심사위원 구성이 조금만 달랐다면 최종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지도 모를 만큼 이 작품이 주는 매혹은 상당했다.

'곰이 돌아왔다'의 장유정도 아까운 응모자였다. 투고작 전부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견고한 시적 형상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지의 조형이나 어조의 완급조절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적 발상이 새롭지 않다는 난점을 갖고 있었다.

이밖에 '누군가의 단검'의 김지연, '애플파이 레시피'의 고태관, '골목은 모퉁이를 돌면 막혀 있다'의 유병현, '불룩한 체류'의 이문정 등도 기억에 남는 작품을 선보인 응모자들이었다. 이들 모두에게 건필의 응원을 보낸다.

2. 동시

한광일, '생각하는 나무'
[당선소감] "작고 아무것도 아닌것들의 목소리 일깨워 주고 싶죠"


중학교 어느 땐가, 살림을 온통 뒤집어 놓는 어머니의 집안 정리를 돕던 중, 누렇게 바랜 원고 뭉치를 보았습니다. 설마 아버지의 습작일 줄은 몰랐습니다. 문학을 위해 특별한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20여 년 초등학교에서 지내다보니 아이들과 함께 읽을 만한 동시를 뒤적이게 되고, 결국 그러다가 동시를 너무 사랑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시도 읽고 수필 쓰는 재미도 알지만, 3년 전부터 나는 이미 동시에 너무 깊이 빠져 버렸습니다.작고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목소리를 일깨워 주는 동시, 아이들을 위로하는 동시, 가끔은 아이들을 철들게 하는 동시를 쓰고 싶습니다.졸작에 미련을 두지 않는 생각하는 나무이고 싶습니다. 수많은 생각의 나뭇잎을 나부끼다가도 이게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다 떨구어 버리고 다시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용기 있는 나무이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문향이 내게로 이어져 기쁘시다는 어머니의 흔들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가슴에 동그란 파문을 일으킵니다. 종종 내 동시를 읽고 재미있다며 호들갑 떨어주는 아내와 두 아이가 나의 연료입니다. 내게 기회를 주신 한국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리라는 약속을 남겨둡니다.
[인터뷰] "어두운 방에 불 켜는 느낌… 메마른 동심에 위로 됐으면"
"작고 보잘 것 없어서 하찮다고 생각되는 것들의 목소리를, 그 소중함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제 동시가 아이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동시 부문 당선자 한광일(47)씨는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을 맡고 있다. 아침 자습으로 칠판에 동시를 써놓기도 하는데, 간혹 흥미를 끄는 글이 올라오는 날이면 아이들은 '다른 거 또 없어요, 선생님'하며 관심을 보인다. 틈날 때마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아이들의 마른 정서가 안타깝다는 그는 "아이들에게 아날로그적인 기회를 많이 주고 싶다"고 했다.2005년에 문예지 두곳에서 수필로 등단한 한씨는 뒤늦게 동시를 읽고 쓰는 맛에 푹 빠졌다. 지난해까지 통일전망대에서 멀지 않은 탄현면 삼성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때 얻은 심상이 마르지 않는 샘이 됐다. "전학년이 6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가 산에 안겨 있는 형상이었어요. 학교쪽으로 구부러진 나무들이 많았는데, 참나무에서 나온 사슴벌레 유충을 채집해 기르는 등 자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시가 떠올랐죠." 일산 집과 거리가 꽤 먼 삼성 초등학교로 출퇴근 하기 위해 자동차는 필수였지만, 책 읽을 시간을 얻으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동시 쓰기에 나섰다. "주변 동료들에게 동시를 써서 보여주기도 했지만 특별히 따로 공부를 한적은 없습니다. 아이들과 20년 넘게 지내다 보니 저절로 아이들의 말과 생각이 담긴 글에 관심이 커진 까닭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죠." 그의 시를 지지해주는 학생들은 또다른 힘이 됐다. 학교 계발활동에서 '동시부'를 꾸리고 있는 한씨는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편으로도 동시쓰기를 권장했다. "패러디 동시 쓰기를 많이 하는데, 좋은 동시를 골라서 직접 써보는 겁니다. 한부모, 다문화, 조손가정 등 다양한 가정형태가 늘면서 전체적으로 예전 아이들이 겪는 것보다 힘들고 복잡한 감정을 혼자 겪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요즘엔 일기를 쓰는 아이들도 많이 줄었는데 내면을 표현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동시는 자연스럽게 자기 생활을 비춰보게 합니다." 동시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힘을 발견했다는 그는 "아동문학이야말로 우리나라 문학의 저변"이라고 강조했다.당선을 알리는 전화에 "어두운 방에 불이 확 켜진 듯한" 느낌이었다는 그는 "동시는 쓸 때마다 새로운 게 나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며 여러권의 동시집을 낼 때까지 꾸준히 정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심사평] "군더더기 없는 생략의 문법… 그 여백이 큰 울림으로"
응모작들을 읽으며 설??? 신인다운 패기와 참신함을 겸비한 작품을 만나 머리가 찌릿하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을 기대했다. 시 한 편으로 동심의 세계를 확 열어 제치는, 동심의 아름다운 세계를 탈칵! 열어주는, 열쇠 같은 명작의 탄생을 내심 고대했다. 동시를 쓰는 마음 자체가 소중하여 응모된 작품들을 몇 번에 걸쳐 꼼꼼히 읽었다. 그러나 작품에 큰 느낌표 표시를 하며, 따로 뽑아놓을 작품이 나타나지 않아 안타까웠다. 시골의 옛날 풍경을, 마치 그런 풍경이 동시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을 했던지, 밋밋하게 그려 놓은 작품들이 많았다. 또 발상의 재미에만 치우쳐 시의 깊이나 완성도를 소홀히 한 것들도 많았다. 응모작 중에는, 도서관에서 책이 대출 되는 순간을 책의 입장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잘 그려낸 작품도 있었고, 비좁은 돌 속에 살아도 미소를 변치 않는 부처를 멋들어지게 형상화해낸 작품도 있었으나, 같이 응모한 작품에 편차가 있어 제외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15편을 골라 충분히 의견을 나눈 뒤, 시의 기본인 운율, 이미지, 사유의 깊이를 중요시하여 당선작을 결정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박서진의 '동그란 걸음'은 완성도가 높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재기 와 발상의 재미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어 단조롭고 울림이 작은 게 단점이었다.당선작으로 선정한 한광일의 '생각하는 나무'는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한 작품이다. 생략의 문법으로 여백을 만들어 울림이 크다. '생각하는 나무'를 통해 '생각이란 나무'를 그려내는 그의 사유에는 분명 격조가 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도 맛깔스러운 언어와 수일한 이미지로 대상을 잘 그려내고 있음을 높이 보았다.3. 동화

이미례 '시계 수리점의 아기 고양이'

시계 수리점 난롯가에서 할아버지가 졸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오전부터 졸아요. 시계 수리를 하러 오는 사람이 없거든요.

예전에는 이 도시에 시계 수리점이 여럿 있었지요. 시계를 차는 사람이 드물어지면서 수리점도 줄어들었어요. 지금은 공원 입구 건너편에 하나만 남아 있답니다.

물주전자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난롯가에서 할아버지는 잠이 들었어요. 작은 소리로 잠꼬대를 해요. 꿈속에서 옛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나 봐요.

먹구름이 하늘에 듬성듬성 박혀 있어요. 구름 그림자가 공원 숲에 드리워졌어요. 숲에는 다람쥐, 까치, 고양이들이 삽니다.

해거름이 되자 공원에서 놀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공원 입구의 시계탑은 언제나처럼 정확한 시각을 알려주며 서 있었고요.

"또오독, 또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어요.

할아버지가 눈을 뜨고 문을 쳐다보았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바람이 장난친 듯했어요.

난로에서 삭정이가 타고 있어요. 삭정이는 할아버지가 땔감으로 쓰려고 공원에서 주워온 것이랍니다.

"똑, 똑, 똑."

할아버지가 문을 열었어요. 찬바람이 얼굴을 잽싸게 문지르고 도망쳤어요.

"안녕하세요?"

"아니, 어떻게?"

할아버지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너라." 수리점 안으로 아기 고양이가 들어왔어요. 고양이는 까만 바탕에 하얗고 동그란 무늬가 있는 얼룩고양이였지요.

"무슨 일로 왔니?"

"저, 그게요."

고양이가 부르르 몸을 떨었어요. 할아버지가 의자를 가리켰어요.

"우선 난롯가에 앉아라."

"할아버지는요?"

"나는 하루 내내 앉아 있었단다."

고양이가 의자로 뛰어올랐어요. 몸집은 할아버지의 두 손 안에 들 정도로 작았지만 몸놀림은 날렵했어요.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그게 뭘까, 할아버지는 생각했어요. 예쁜 조끼를 달라는 것 아닐까? 사람들이 공원에서 데리고 다니는 개들은 그런 조끼를 입지. 어른 고양이들은 자신의 털외투가 조끼보다 훨씬 더 예쁘다고 여기지만 아기 고양이는 아닐 수도 있어.

"부탁을 말해봐라."

"시계를 고쳐주세요."

"네 시계를 보자."

고양이가 어스름 속의 시계탑을 가리켰어요.

"저 시계가 천천히 가게 해주세요."

할아버지가 난로 뚜껑을 열었어요. 불꽃이 바깥으로 튀어나왔어요. 할아버지가 난로 속을 들여다보더니 삭정이 몇을 넣었어요.

"부탁을 들어주실 거죠?"

할아버지가 컵에다 주전자의 물을 따랐어요. 연분홍 빛깔이 나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컵이랍니다.

"우선 이걸 마셔라."

고양이가 후후 불며 물을 마셨어요.

"따뜻해요."

눈이 오기 시작했어요. 공원의 가로등 불빛을 받은 눈송이들이 춤을 추었어요. 할아버지와 고양이는 눈의 춤을 구경했지요.

"눈이 오면 좋지?"

"그럼요. 놀이도 하고 노래도 불러요. 엄마가 가르쳐주었지요."

고양이가 노래할 때처럼 앞발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어요. 난롯불이 발바닥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어요.

"난로가 엄마 같아요."

할아버지가 고양이 등을 쓰다듬었어요. 고양이는 엄마 옆에 누워 있을 때처럼 눈을 감았어요.

눈보라가 유리창을 두들겼어요. 고양이는 의자에 엎드려 잠이 들었고요. 가끔 볼수염을 움찔거리고 꼬리를 흔들어요. 친구들과 노는 꿈을 꾸나 봐요.

할아버지가 자루에서 고구마 두 개를 꺼냈어요. 난로 위에다 얹어 놓았어요.

눈 쌓인 길에 차들이 뜸해졌어요. 공원의 가로등은 발아래서 잠든 눈송이들을 비추며 졸고 있었습니다.

난로 속에서 불길이 잦아들었어요. 삭정이를 더 넣어야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러지 않았어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양이가 깰 수 있거든요.

난로는 여전히 따뜻했어요. 아직은 불잉걸이 남아 있으니까요.

고양이가 잠결에 허리를 폈어요. 귀는 겨울바람에도 시들지 않는 상록수 이파리와 닮았어요. 볼수염은 힘차게 뻗어 있고요. 다문 입은 하얀 초승달 모양이에요.

할아버지가 고양이를 들여다보았어요. 앞발에 흙이 묻어 있었지만 털빛은 깔끔했어요.

'지난 초가을에 떠돌이 길고양이가 공원으로 왔지. 새끼를 배고 있었어. 그 어미가 새끼를 낳았으면 이제 젖을 뗄 때가 지났구나. 그런데 참, 그 어미 고양이도 까만 바탕에 하얀 무늬가 있었지.'

할아버지가 고양이 발톱에다 손을 내밀었어요. 작지만 날카롭고 튼튼한 발톱이었어요.

'길고양이 식구들은 한 곳에 머물러서 함께 살 수 없어. 사는 곳은 점점 비좁아지고 먹이는 부족하니까. 새끼는 엄마와 헤어져 혼자 살아가야 하지.'

할아버지는 어미 고양이를 만났던 공원으로 눈길을 돌렸어요. 머리에 눈을 인 시계탑이 공원 숲을 뒤에다 두고 서 있었어요. 하얀 털모자를 쓰고 숲을 지키는 거인 같았습니다.

고구마 익어가는 냄새가 퍼져 나왔어요. 고구마를 잘 구우려면 서둘러서는 안 돼요. 겉이 익은 듯 보여도 속은 그대로이거든요. 할아버지가 서두르는 경우는 없지만요. 늘 졸고 있는데 서두를 턱이 있나요.

"아, 잘 잤다."

고양이가 일어나 앞발을 쭉 내밀어 허리를 폈어요. 볼수염과 두 귀는 세웠고요. 꽃잎처럼 생긴 혀를 내밀어서 입 주위도 닦았지요.

"할아버지, 시계를 천천히 가게 해주세요."

"그러마."

"고맙습니다."

"뭐 하나 물어도 될까?"

"그러세요."

"왜 시계를 천천히 가게 하려는 거냐?"

고양이는 앞발로 의자만 꾹꾹 눌러댔습니다. 어릴 적 젖을 먹을 때 앞발로 엄마 젖을 그랬던 것처럼요.

"말 안 해도 되지만 궁금해서 물어본 거란다."

"엄마와 헤어졌거든요."

"저런."

"우리 형제가 젖을 떼자 엄마는 주택가로 이사 가야 한다고 하셨어요. 나무 굴보다 더 따뜻한 곳이 있고 사람들한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대요. 엄마는 몸이 약한 동생을 데리고 떠났어요."

"너는 씩씩한 아이여서 공원에서 혼자 살기로 했구나."

"엄마와 언제까지 함께 살 수 없다는 거야 진즉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막상 엄마와 헤어지고 나니까……."

고양이는 더 세고 빠르게 꾹꾹이를 했어요.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면 안 돼요. 그럼 엄마와 빨리 멀어지는 거니까요."

난로 위의 고구마가 다 구워졌어요. 할아버지가 고구마를 접시에다 놓았어요. 군고구마 둘은 형제 고양이처럼 몸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자, 군고구마 좀 먹어봐라."

"시계탑의 시계를 고쳐주세요."

"먹고 있어라. 그 동안 이 할아버지가 시계를 천천히 가게 만들어놓을 테니."

할아버지가 시계탑을 보고 주문을 외웠어요. 노래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요.

할아버지가 손뼉을 두 번 쳤어요.

"자, 됐다. 내일 아침에 보면 시계가 천천히 갈 거다."

고양이가 고구마를 조금 떼어내 우물거렸어요. 잠시 후에 앞발로 움켜쥐고 먹어댔어요.

"겨울 들어서 이렇게 따뜻한 먹이는 첨 먹어봐요."

"그러다 체한다. 물도 좀 마시려무나."

할아버지가 분홍 컵에다 따뜻한 물을 채워주었어요.

"따뜻해요. 군고구마도, 물도 따뜻해요."

"늘 춥지?"

"새벽에 가장 추워요."

"봄이 오면 새벽에도 춥지 않을 거야."

"엄마도 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봄이 오면 엄마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공원에는 봄꽃이 많이 핀단다. 엄마가 꽃구경을 오지 않겠니?"

할아버지는 봄꽃을 알려주기로 했어요. 아무래도 매화가 일찍 피어나니까 매화부터 얘기했지요. 매화 향기와 생김새를 말해주었어요.

"매화나무 아래서 엄마를 다시 만나고 싶어요. 겨울을 넘긴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거든요."

"엄마는 널 자랑스러워하실 거다."

"그럼 시간이 빨리 지나가야 하는데……."

고양이가 꼬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다가 멈추었어요.

"할아버지, 시계를 빨리 가게 할 수는 없나요?"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번에도 주문을 외웠지요. 노래인지 중얼거리는 것인지 구분이 잘 안 갔어요. 아무튼 그런 주문을 외우고 나서 손뼉을 두 번 쳤습니다.

"시계가 빨리 가게 했다."

고양이가 눈을 깜박였어요. 앞발로 콧등에 묻은 군고구마 숯검정을 닦고 나서 물었지요.

"아까는 천천히 가게 바꾸었죠?"

"그랬지."

"방금은 빨리 가게 했고요?"

"그랬다마는 뭐가 잘못 됐냐?"

"천천히 가는 걸 빨리 가게 만들었으니까 원래대로 된 것 아닌가요?"

"그렇게 됐나? 허허허."

"할아버지, 혹시 엉터리 시계 수리공 아니세요?"

"뭐, 그럴 수도 있지."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난로에다 삭정이를 그득 넣었어요. 밖은 점점 추워지고 난롯불은 활활 타올랐어요.

아침에야 할아버지는 잠에서 깨어났어요.

문밖에는 눈이 쌓여 있고 고양이 발자국이 또록또록 나 있었어요. 발자국은 길을 건너고 시계탑을 돌아서 공원 숲으로 이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아기 고양이 발자국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어요. 발자국은 매화꽃과 닮아 있었어요.

[당선 소감] "난로 위 포근포근 구워지는 고구마 같은 이야기 담아낼 것"

당선되셨습니다.

푸른 이십 대, 그저 시인이고 싶었던 때부터 오랜 동안 숨 쉬고 있던 내 안의 열망이 한꺼번에 깨어났습니다.

터질 듯한 가슴으로 공원에 갔습니다.

여전히 머리에 눈을 이고 선 시계탑이 미소 띤 눈길로 내려다보고, 그 아래 나의 아기 고양이가 웃음으로 맞아줍니다. 그래요, 모두 고마웠어요!

내가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처럼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격려로 항상 첫 독자가 되어 준 남편과 늘 부족한 엄마여서 미안하고 고마운 딸 소라와 아들 대한이, 벅찬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적지 않은 세월의 더께에도 주눅 들지 말라는 뜻으로 부족한 글 뽑아 주시고 열심히 쓸 수 있도록 큰 용기를 주신 황선미 작가님과 원종찬 교수님, 두 분 심사위원님께 마음을 다하여 감사드립니다.

이전과는 다른 시작, 새로운 길 위에 떨리는 가슴으로 섰습니다.

지금까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함께했듯, 이제부터는 너른 세상 아이들과 이야기를 담고 만나겠습니다. 바람찬 겨울에도 아이들 마음 속 난로 위에서 속까지 포근포근 구워지는 고구마 같은 이야기 말입니다.

[인터뷰] "습작 놓은지 오래였지만 글 쓰고 싶은 욕망 불길처럼"

"책 읽어주는 선생님에서 동화를 쓰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미례(52)씨에게 올해는 특별했다. 30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지내다 올해 초부터 파견 근무 형식으로 광주교대 교육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서 오랜 꿈이던 동화를 쓰게 됐다. 그리고 뜻밖에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통보를 받았다. "20대에 시와 동화를 써서 여러 번 응모했지만 잘 안돼 마음을 접었어요. 12월만 되면 열망에 휩싸이긴 했는데 참았죠. 그런데 올해는 내 공부를 하기도 했고, 불씨가 확 살더라고요."

습작을 안한 지 오래였지만 교직생활을 하면서 항상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컸다. 이씨는 따로 습작 모임을 갖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일상적으로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게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젊은시절 함께 글을 썼다는 그의 남편은 희곡으로 먼저 등단했으며, 3년 전에는 광주 5.18기념 문화센터 무대에 작품을 올리기도 했다. "첫번째 독자로 제 동화를 읽어주고 비판해 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감성이 돋보이는 당선작은 엄마와 헤어진 고양이가 시계 수리점의 할아버지를 찾아가 엄마와 빨리 만날 수 있도록 시간을 돌려 달라는 이야기다. 6년 전 살고 있는 아파트 옆 공원을 산책하다 만난 갸냘픈 새끼 고양이가 이야기의 소재가 됐다. "원래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울음소리가 하도 애달파서 찐 고구마를 갖다 준 게 발단이었어요. 길고양이 아홉마리를 먹이고 있는데, 내 삶에만 빠져 있다 길에 사는 생명의 아픔과 아름다움을 돌아보게 됐죠. 지금은 고양이들과 대화하듯 소통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 정도예요."

고양이를 매개로 동화를 쓴 이유는 그뿐이 아니다. 아픈 구석을 도드라지게 부각하는 동화보다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판타지를 가미한 동화를 쓰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저학년을 주로 가르치는데 학교 현장에서 보면 사회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아픈 구석이 많아요. 시골 같은 경우도 학교가 통폐합되면서 통학거리가 멀어져서 스쿨버스 시간을 맞춰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저학년도 학원이나 방과후 학습을 해야만 해요."

뛰어 놀 시간이 없는 아이들의 황폐한 정서가 안타깝다는 이씨는 담담하고 소박하게 아이들을 동화의 세계로 이끌고 싶다고 했다. "잔잔하게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그러면서도 상상력을 고양시켜줄 동화를 쓰고 싶습니다."


[심사평] 정답고 애잔한 정서 속 대상에 대한 성숙한 인식 돋보여

문학도에게 신춘문예란 단순한 상 이상의 무엇이다. 이 관문을 통과한 사람, 끝내 그러지 못한 사람, 응모작을 검토하는 사람조차 감정의 질은 다를지라도 가슴 묵직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드니. 응모작들이 우리 삶을 모자이크 해주는 거야 당연한데 그 내용 때문에 이번처럼 우울한 적이 또 있었을까. 상당수가 편부모 가정, 집단 괴롭힘, 성폭행, 편견 등 어두운 현실을 다루었다는 그 경향만으로도 우울한데 문제를 드러내기만 한 의식에는 많이 암담했다.

본심에 올려놓고 고민한 작품은 '어떤 평화' '무 뽑는 날' '번개의 전설' '우산' '시계 수리점의 아기 고양이'였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동화의 분위기를 잘 구현해 낸 편이었고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얻었다.

'어떤 평화'는 까마귀의 눈으로 서식지의 변화를 바라본 시도는 좋았으나 환경과 개발에 대한 고민이 기왕의 습관적 방식에 그쳐버렸다는 아쉬움이 컸고, '무 뽑는 날'은 인물들의 입말이 아주 감칠맛 나고 문장의 완성도가 좋은 반면 땅 수호신의 등장이 부자연스러운 결점을 보였고, '번개의 전설'은 번개를 맞으면 생명을 얻게 되는 우산들의 전설을 흥미롭게 설정하고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컸다. '우산'은 아이다운 감성과 빛이 느껴지고 읽는 내내 환한 그림이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인물 간의 믿음과 관계형성이 건강하고 아이와 여우의 대화가 재치와 더불어 말끔하다. 그러나 어린왕자 이야기에 상당량을 할애하고도 정작 스토리 라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사실은 지금부터일 것 같은 미진함이 남은 상태라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가 어려웠다.

'시계 수리점의 아기 고양이'는 소재의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당선작으로 올리기에 충분했다. 직조된 전체 그림이 정답고 애잔한 정서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문장의 리듬감이나 언어의 운용이 자연스럽다. 특별한 설정 없이도 환상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능력과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 대상을 대하는 인식에 성숙함이 돋보여 이 작가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어졌다. 멋진 출발에 박수를 보낸다.

[2013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시 부문 - 이해존 ‘녹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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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시 당선소감 - “지치지 않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사무실 마감 일 때문에 정신없을 때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버리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잊기 위해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때였습니다. 연말연시를 생략하고 2월의 어느 일상으로 앞질러가고 싶을 때였습니다. 믿기지 않아 당선 전화를 받고난 후, 누군가 잔인한 위로의 장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확인 전화까지 해야 했습니다.

영화 <폴락>에서 피카소는 ‘질서’를, 폴락은 ‘무질서’를 화폭에 담아냅니다. 피카소는 성공을 거둘수록 행복해지지만, 폴락은 그 반대가 됩니다. 성공할수록 질서가 잡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겠습니다. 최종심에서의 수많은 고배가 모루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위로를 건네준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옆에 계신 것만으로도 가르침이 되어주시는, 언제나 현역이신 정진규 선생님 그리고 이승훈, 김소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분화구 절벽에 둥지를 틀어 날아오를 수밖에 없는 태생의 시천동인들, 전형철, 윤성택, 안시아, 최치언, 천서봉, 박성현, 서동균 시인, 김솔 소설가, 고영, 박후기 선배님, 가까이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주신 부모님과 최희강 시인 그리고 등단을 손꼽아 기다려준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긴 어둠에서 불을 밝혀 주신 황현산, 박주택 심사위원님과 경향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굳은 결의는 변명의 다른 이름일지 모릅니다. 그냥 지치지 않고 열심히 쓰겠다는 말로 대신합니다.

■ 이해존
△1970년 충남 공주생 △여러 출판사의 편집자 생활을 거쳐 현재 월간 ‘현대시학’ 편집장
시 심사평 “시는 자신을 비워줄 때 조금씩 다가오는것”문학평론가 황현산·시인 박주택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시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기예를 넘어 정신의 한 경지를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시다운 시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온힘을 다하여 시에 헌신하고 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비워줄 때 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조금씩 다가온다. 시는 결코 설익은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최종에 오른 네 편의 시 가운데 ‘그 여자의 거실에는 기차가 달려가지’ 외 4편을 응모한 서진배의 시는 발랄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산문적 진술에 기대고 있고 급격히 장면을 전치시키거나 전복시켜 시를 읽는 데 재미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했다. ‘침묵의 불법 점거에 대한 진술서’ 외 4편의 김희정의 시는 소음과 환청, 자본주의와 물신과 같은 도시적 생태를 다루고 있으면서 눅눅한 서정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시의 관절이 부드럽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쉽게 선외로 밀렸다. ‘귀갓길’ 외 4편의 김창훈의 시는 “그림자에도 단내가 난다” “노을에도 마블링이 있다”와 같이 선후 문맥을 잇는 뛰어난 관찰력과 세밀한 묘사력이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녹번동’ 외 4편을 응모한 이해존의 시는 그간의 적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어 당선작으로 합의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을 구조(構造)하고 있는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해 사유와 감각을 적절하게 가로지르며 생의 경험이 곧 시의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었다.

모름지기 시는 시여야 한다는 기원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조차 모른다면 시는 언제 찾아올 것인가? 당선자의 대성을 기대해본다.

<세계일보 시 당선작>

히말라야시다
신은숙


나무는 그늘 속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지

수백 겹 나이테를 걸친 히말라야시다 한 그루
육중한 그늘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갉아먹고 있다

흰눈 쌓인 히말라야 갈망이라도 하듯 거대한 화살표
세월 지날수록 짙어가는 초록은 시간을 삼킨 블랙홀의 아가리다

빨아들이는 건 순식간인지도 모르지, 그 속으로

구름다리 건너던 갈래머리 아이도 사라지고
수다 떨던 소녀들도 치마 주름 속으로 사라지고
유모차 끌던 아기엄마도 사라지고
반짝이던 날들의 만국기,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도 사라지고

삭은 거미줄 어스름 골목 지나올 때
아무리 걸어도 생은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할 때
부싯돌 꺼내듯 히말라야시다 그 이름 나직이 불러본다
멀어도 가깝고 으스러져도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바람 막는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해마다 굵어지고 짙어지는 저 아가리들
쿡쿡 찌르고 찌르면 외계서 온 모스부호처럼 떠돌다 가는 것들
멍든 하늘을 떠받들고 선 나무의 들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삼켜지지 않는 그늘 속엔 되새떼 무리들
그림자 하나씩 물고 석양 저편으로 날아오른다

[2013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섬, 이유 /김유경


이 섬에선 사람이 죽으면 바람에 묻는다
그건 섬의 풍토병 같은 내력이어서 여자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비의 아이를
박주가리 씨앗처럼 품은 채 바람에 묻혔다
은행나무가 여자의 무덤이며 묘비명이었다
남은 여자들이 제 주검을 보듯
길게 울다 돌아갔다, 섬에서 여자가 죽으면
살아서 뜨겁고 애달팠던 곳이 먼저 젖는다
바람은 젖어 있는 것부터 시나브로 말린다
소금에 간이 밴 깊이를 모두 말려
눈물의 뿌리가 마른 우물처럼 바닥을 드러내면
영혼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의 법이다
하루 두 번 물마루 끝이 어물어물 붉어지고
꼭 쥐고 있던 바람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면
섬은 귀를 열고 듣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돌아오지 않는 아비들의 빈 배가 웅웅 우는 소리를
죽은 여자는 그 소리에 기대어 바람 몰래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 뭉텅뭉텅 사라지는 몸에서
눈동자는 빛을 잃고, 머리칼은 제멋대로 자라나온다
아이를 품은 움 같이 보드라운 궁륭, 그 곳에선
바다 밑바닥에서만 나는 해초 내음이 나날이 짙어졌다
마침내 바람이 여자를 온전히 데려갈 때
죽은 여자는 아이를 은행나무 잎 속에 묻어두고
떠난다, 홀로 누워 있었던 자리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수북 쌓인다, 가을 한 철 내내
바람의 장례가 제 열매 다 익도록 잎을 물들이지 않는
은행나무의 사랑 같은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바람이 먼 바다 부표를 향해 치솟아 올라 길을 잡고
여자의 푸른빛 인광은 그리운 바다를 향해
따뜻하게 흘러간다, 아이는 그 바다 어디쯤에서
돌아오지 못한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닮았지만
섬도 바람도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서울신문>

1. 시조

연암, 강 건너 길을 묻다 / 김종두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
낯선 시간 마주보며 갓끈을 고치는 연암,

은어 떼 고운 등빛에 야윈 땅을 맡긴다.
근심이 불을 켜는 낯선 세상 왼 무르팍,
벌레처럼 달라붙은 때아닌 눈발 앞에

싣고 온 꿈을 물리고 놓친 길을 묻는다.
내일로 가는 길은 갈수록 더 캄캄해
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
산과 들,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

2. 시

저무는, 집/여성민


지붕의 새가 휘파람을 불고, 집이 저무네 저무는, 집에는 풍차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고 집의 세 면을 기다리는 한 면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 저무는 것들이 저무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엔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저무는 것이 있고 저물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저물지 못하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저무는 집에 관하여 적네 적는 사이, 집이 저무네 저무는 말이 소리로 저물고 저물지 못하는 말이 문장으로 저무네 새는 저무는 지붕에 앉아 휘파람을 부네 휘파람이 어두워지네 이제 집 안에는 저무는 것들과 저무는 말이 있네 저물지 못하는 것들과 어두워진 휘파람이 있네 새는 저물지 않네 새는 저무는 것이 저물도록 휘파람을 불고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 사이로 날아가네 달과 나무 사이로 날아가네 새는 항상 사이를 나네 달과 나무 사이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의 사이 그 사이에 긴장이 있네 새는 단단한 부리로 그 사이를 찌르며 가네 나무가 달을 찌르며 서 있네 저무는 것들은 찌르지 못해 저무네 달은 나무에 찔려 저물고 꽃은 꿀벌에 찔려 저물고 노을은 산머리에 찔려 저무네 저무는, 집은 저무는 것들을 가두고 있어서 저무네 저물도록, 노래를 기다리던 후렴이 노래를 후려치고 저무는, 집에는 아직 당도한 문장과 이미 당도하지 않은 문장이 있네 다, 저무네

<무등일보>

고로쇠 옆구리 / 김정애


뚫어야만 다스려지는 상처가 있다
뭉툭한 옆구리에 핏물을 가두고
거친 호흡으로 살아가던 나무가
잎사귀의 언어로 조용히 말을 걸어올 때
꿈의 밑동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세상에 저문 울음들을 끌어안고
복수腹水를 다스리는
노모의 시간

살갗 밑으로 가는 뿌리가 자라나고
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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