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집
돌샘 이재영
혹자는 궁궐 같은 집을 선호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절세가인 부인을 원하지만 나는 정원이 아름다룬 집을 택하리라. 그러나 원하는 집에 한 번도 살지 못했지만, 30대에 넓은 정원이 있는 집에 산 적이 있다. 이 집은 범어성당 서편 하천가에 있는 240평 부지였다. 원전 70평 위에 주택과 작은 정원이 있었고, 하천 위엔 계사가 담장이 된 집이다. 어느 대학 농대 축산과 교수가 살던 집이다. 계사를 방으로 꾸며 여섯 가구가 오순도순 살았다.
원채 앞 정원엔 가이즈까향나무와 금잔디를 심고 둘레엔 채송화가 연중 핀다. 정원 한 쪽에 탁구대가 놓여 아이들의 친구들이 모여들기도 한다. 그러나 헛간을 헐고 현관 앞에는 정원석과 반송 철쭉 연산홍 금잔디로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꿈이다. 서편엔 100여 평 공지가 있었다. 만생종 신고배나무 10여 그루와 조생종 두어 그루, 수밀도 복숭아 한 그루를 심었다. 집안에 조그마한 과수원이 되었다. 나무 사이에는 온갖 채소가 자란다.
하천가라 모래와 자갈땅으로 일 주일만 가물면 채소가 시든다. 그런데도 나무는 잘 자랐다. 삼사 미터 지하엔 물 천지라 파이프를 박고 모-타로 지하수를 퍼 올렸다. 정원과 허드렛물은 이 물을 사용하니 식물을 키우기는 적지였다. 삼 년이 지나니 나무가 자라 꽃이 피고 과일이 열렸다. 첫해는 꽃만 보고 과일은 다 땄다. 우리 집엔 봄이 오면 꽃동산이다. 활짝 핀 배꽃 가지에 보름달이 걸리면 시 한 수가 저절로 나온다. 배꽃은 요조숙녀요, 복숭아꽃은 요염한 요정 같다. 밤 깊으면 뒷문 밖 성당 숲에서 소쩍새가 운다. 도시 한복판에 심산유곡의 운치가 흐른다. 아름다운 봄밤이 지나가는 안타까움에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큰 기쁨을 주는 것은 배나무다. 꽃이 곱기도 하지만 꽃이 지면, 염주 같은 열매가 조롱조롱 맺는다. 드문드문 하나씩 두고 다 따주었는데도 일주일이 지나면 또 빡빡하다. 열매가 자라는 모습이 자식처럼 귀엽다. 단 번에 사정없이 속아야 열매가 충실하다. 그러나 손이 떨려 몇 번을 따주어야 알맞게 단다. 그러면 가을에는 어린이들의 머리통 같은 큰 배가 주렁주렁 달려 온 집안을 장식한다. 배가 황금빛으로 물들면 광택이 자르르 흐르며 열아홉 살 처녀 같이 아름답다. 한 입 꽉 깨물면 향내가 진동할 것 같고, 달콤한 물이 입안을 녹일 것만 같아 군침이 돈다.
그러나 두고 보는 것이 더 좋아 함부로 딸 수가 없다. 이 때 오는 사람마다 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이 집은 부자다. 이 집은 낙원이요 선경 같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탄하며 부러워한다. 시장에 배는 봉지를 씌워둔 채 수확 후 팔면서 익는다. 그래서 배의 빛깔이 선명하지 않고 죽은 빛이다. 참신한 맛도 나지 않는다. 우리 배는 나무에서 햇볕을 받으면서 완전히 익은 후에 따기 때문에 어느 배보다 맛이 좋고 황금빛로 윤기가 흐른다.
어느 과일이나 나무에 달려 익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배만큼 탐스러운 것은 본 적이 없다. 이 배는 과육 질이 보드랍고 사박사박하며 감미가 짙고 물이 많아 입 안에 넣으면 저절로 사르르 녹는다. 어디 그 뿐이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배나무를 가꾸는 기쁨이다. 나는 배밭에서 일하면 밥 먹는 것조차 잊는다. 그 만큼 나의 기쁨은 언제나 절정이다. 구경하는 이웃들도 기쁨을 공감한다 하니 더 즐겁다. 우리는 언제나 모두 한 식구가 되어 배의 아름다음과 향기를 함께 나누며 즐긴다. 또 길흉사엔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정이 깊어간다.
친구들과 매화산을 오를 때 이 배를 서너 덩이 갖고 갔다. 그들은 짐을 덜려고 등산 초입부터 과일을 서로 내놓았다. 나는 참고 또 참았다. 정상에 오르니 과일도 물도 다 떨어졌다. 목이 바삭바삭 탔다. 그 때 배를 내 놓았다. 모두 배의 크기에 깜작 놀랐다. 깍은 배를 한 입 꽉 깨물더니 또 놀란다. "이렇게 향이 좋고 맛있는 배는 처음 먹어본다." "이것이 배의 진미이구나!" 한다. 세월이 10년 지난 뒤에도 친구들은 그 배를 찾았다.
내가 아직도 그 집을 잊지 못하는 것은 한 집에 여러 가구가 10년 이상 살았어도 말다툼한 적이 없었다. 아주머니 들은 우리배추 씻어 점심만은 밖에서 함께 먹고 가을에는 배로 후식을 든다. 남자들은 산행을 가끔 했다. 그 시간은 웃음꽃이 피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그 즐거움도 이 아름다운 정원 과 배의 향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불편한 집에서도 이사 가는 사람이 없었다. 이웃과도 문을 활짝 열어놓고 정을 나누면서 다정하게 지냈다. 이러한 화해무드가 조성된 것도 아름다운 정원과 배향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때 나는 대학생 세 명에, 해마다 공납금보다 더 많이 나오는 화천부지 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이 집을 팔고 말았다. 어디 간들 이보다 아름다운 정원과 배맛 같이 싱그럽고 향기 나는 이웃들이 또 있을까? 그렇게도 찾고 갖고 싶어 했던 아름다운 정원이 여기인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지금은 모두 잘 살지만 만나면 반가워 서로 얼싸안고 떨어질 줄 모른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일수록 사람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이라 배 향기 같은 그분들과 아름다운 정원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