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향기 속에
돌샘 이재영
내가 꽃을 좋아하니 어느 해 가을, 대국 화분 세 개를 제수씨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노오랑, 흰색, 분홍 꽃이 내 첫사랑의 소녀 같다. 고요하고 아름답던 한 소녀를 사모하여 그 꽃 앞에 서면, 옛 소녀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날부터 직장을 마치자 집으로 돌아와서 국화에 온 정성을 쏟았다. 그 해는 세 화분이 집안을 환하게 장식하더니 눈이 하얗게 덮이던 날 고고한 자태를 잃고 꽃이 졌다. 애인을 잃은 듯 서운했다.
죽은 대궁을 잘라내고, 가끔 물을 주었더니, 이듬해 봄에 새싹이 났다. 죽은 애인이 돌아온 듯 기쁘다. 정성껏 길러 20Cm 가량 자란 굵고 튼튼한 줄기를 서너 마디씩 잘라, 순 모래를 담은 큰 나무 박스에 꽂아놓았다. 여기에 조생종과 중생종을 더하여 반그늘에 놓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었더니, 한 달이 지나니, 뿌리가 내리고 속잎이 돋았다. 100여 개가 넘는 화분을 자람에 따라 점점 큰 화분으로 몇 차례나 갈아주려면 그 일이 보통이 아니요, 화분도 몇 백 개가 있어야한다.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이, 최대한 늦게 옮겨 자랄 기간을 짧게 주자고 결론지었다. 이것이 화분을 갈지 않고도 웃자람을 예방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적중했다. 진딧물 예방은 진딧물에만 치는 약을 써야 서너 번만 쳐주면 끝난다.
한 더위가 가고 시원한 9월 중순, 발근한 묘를 흙과 낙엽 썩은 거름 반을 섞어 분에 삼분의 이 조금 더 채우고 옮겨 심었다. 소형화분에는 한 포기, 중형엔 두 포기, 중대형 세 포기, 대형에는 네 포기를 심었다. 화분을 충분히 물을 주어 반그늘에 두고 아침저녁 매일 물을 주었다. 10일 정도 지나니 살아 붙어 생기가 돌았다. 배란다, 이층, 옥상 등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겨 처음에는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었지만. 나중에는 안 죽을 정도로 물을 주었다. 국화도 분재처럼 마디가 불거지고 난장이가 되어야 멋있고,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분재가 풍우를 이기고 구사일생으로 연명하며 고생고생 자란 것이 작품이 된다. 국화 역시도 예술품이 되려면 그런 과정을 이겨내야 멋있는 몸맵시와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인간이 되려면 고행이 따르듯 국화도 천하에 미색이 되려면 인고의 진통이 따르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직장에서 돌아오면 인생을 국화에 묻고 자식처럼 돌보면서 정성을 다했더니, 10월 초에 첫 꽃망울이 맺혔다. 한 대궁에 한 알만 두고 다 땄다. 계속 맺는 꽃을 따주지 않으면 작품을 망친다. 꽃망울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 처녀의 유방처럼 소담스럽고 아름답게 자랐다. 시월 말경 한 잎 두 잎 꽃잎이 벌어지더니. 마지막 꽃잎이 벌어질 때는 마치 공작이 나래를 편 듯 아름답고 우아하다. 키는 분재처럼 작아도 꽃은 모두 크고 탐스럽다. 청자화분에 작은 국화 한 포기를 옮겨 은쟁반 받쳐 내 책상 위에 놓았다. 국화가 떠오르는 햇살 머금고 있는 모습은 보살의 미소를 보는 듯 마음을 아름답게 순화시켜준다. 어느 장식이 이보다 더 화려하고 격조 높은 예술품이 있을까? 큰 교무실 책상 위에 드문드문 화분을 놓았더니 국화 향기로 분위가 새롭다.
나의 집 현관에는 추석이 되면 조생종 국화가 활짝 웃으며 손님들에게 기쁨을 준다. 그때부터 가을 내내 꽃이 피면 온 가족들은 행복하다. 찬 서리가 하얗게 내릴수록 국화는 더 곱고 향기가 짙다. 뜰에 빨간 단풍과 조화를 이룰 때는 화원 속에 있는 듯 황홀하다. 대문 안에 들어서면 베란다, 현관, 이층, 옥상까지 온 집안이 국화향기로 진동한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이는 날은 베란다와 현관에 있는 국화는 더 청초하고 아름다워 눈 속에 설국은 예술의 극치를 이룬다.
그때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너와 정 깊은 지도 이십여 년, 아기 마냥 보살피며 자식같이 길렀네. 생기 어린 잎새 굵고 짧은 대공 마디마디에 내 숨은 정성 서리어 나의 희망 꽃피었네. 해마다 피던 꽃 올해는 철 지나도 피지 않더니 뜰에 단풍잎 빨갛게 익고 된서리 하얗게 내리던 날 노랑, 분홍, 하얀 꽃, 젊은 날 귀엽던 나의 소녀여! 오늘은 백설이 건곤에 가득하니 눈 속에 설국 애처로워 가슴 타건만, 네 향기 속에 아름다움의 극치를 본다.
국화 앞에만 서면 불거진 줄기 마디마디에 묻어나는 나의 손결을 느끼며, 한없는 애정으로 국화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지나간 고생과, 세속의 번뇌를 국화 앞에서는 모두 잊는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20년, 나도 이젠 고목처럼 구겨진 채, 국화에서 손 뗀지 10 여 년이 지났건만, 가을만 되면 국화의 모습이 눈에 삼삼 어린다.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다. 옛부터 사람들은 국화를 일러 맑은 향기가 집안 가득하니 외로운 듯 꽃다운 향기가 속세를 누른다.(淸香一室, 孤芳壓俗姿)라고 극찬했다. 매화는 잠시 피었다가 시들고, 난은 너무 고고하여, 접근하기가 어렵다. 죽은 너무도 강하여 부러지기 쉬우나 국화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외로운 듯, 쌀쌀한 듯하면서도 다정하고, 누님 같이 포근하다. 국화는 첫사랑의 소녀요, 만인의 애인이다. 그래서 국화에 대한 나의 사랑은 영원하리라.
*傲霜孤節(오상고절):서릿발이 심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외로히
지키는 절개.
*淸香一室孤芳壓俗姿(청향일실고방압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