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꽃향기 진동하던 날 > 정겨운속삭임

본문 바로가기
|
10-02-24 08:38

난꽃향기 진동하던 날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목    록  
난꽃향기 진동하던 날
돌샘 이재영

햇살이 잘 드는 3층 어느 교무실 창가엔 소심난 50여 화분이 나란히 서 있다. 이 화분은 그 학교 교사들이 집에 있는 화분을 갖다놓기도 하고 사다 놓기도 한 것이다. 올봄에 새로 부임한 생물교사가 난 화분 3개를 갖다놓은 것이 모두 꽃이 활짝 피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난 키우는 법을 배우고자 갖다놓은 화분들이다.
김 교사는 난을 기르는 법은 물 주기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난은 물을 많이 주어서 죽으며, 물을 적게 주면 죽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죽지 않을 정도로 물을 주어야 살며 꽃도 잘 핀다고 한다. 교무실에 있는 난들이 사 올 때는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진 뒤에는 다시 꽃이 피는 것을 보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김 교사가 온 후로는 교무실의 난은 모두 꽃이 피었다. 집에 있는 난들이 시들면 교사들은 모두 교무실로 갖고 왔다. 심하게 망가진 것은 분갈이를 하고, 주사를 놓기도 하며, 웬만한 것은 난비료를 주고, 물은 하절기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합동으로 주었다.
모두 이듬해 봄에는 자기 난들이 꽃을 피우리란 희망을 안고 자식처럼 정성을 쏟아 길렀다. 서너 달 후 거의 망가져가던 난들도 생기를 띠더니 새 촉이 돋아났다. 이듬해 봄이 되니 하나 둘 꽃이 피기 시작하여, 연속해서 가을까지 꽃이 핀다. 온 교무실이 향기로 가득하다. 모두 지친 피로를 말끔히 잊고, 환한 미소로 종일 기분이 좋아 한다. 꽃이 핀 화분 주인들은 자신도 난을 꽃피울 수 있다는 만족감에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난은 다 피었는데 나의 난은 아무 소식이 없다. 실망이 컸다. 난 담당교사와 함께 난집에 가서 모양 좋고 꽃이 잘 핀 것으로 특별히 골라 온 것인데 내게 실망을 주다니 기대했던 희망이 일시에 무너졌다. 모두들 과학 선생 것이 저모양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핀잔을 준다. 그러나 아무런 대꾸할 말이 없어 마음은 한없이 괴로웠다.
가을이 깊어 이젠 휴면기에 들었나 싶어 포기했는데 뜻밖에 꽃대가 올라왔다. 생기 있는 잎새 연약한 듯 단단한 사이로 보랏빛 살진 줄기 두 대가 힘차게 올라왔다. 내 희망의 싹이 튼 것이다. 대기만성이라고 하더니 역시 예술은 늦게 이루어지나 보다. 줄기가 나오기 무섭게 이젠 급한 듯 쑥쑥 자라더니 꽃망울을 조랑조랑 터트린다.
단풍잎도 거의 진 만추, 쌀쌀해진 날씨에 꽃망울이 하나 둘 터지기 시작하더니 멈추지 않고 핀다. 그러나 꽃이 다 피려면 며칠 더 걸릴 것 같다. 이튿날 상쾌한 아침 출근길 걸음이 바쁘다. 난을 보기 위해서다. 교무실 문을 들어서니, 햇볕이 창살에 눈 부신다. 밤사이 난이 활짝 피어 떠오르는 햇살 머금고 방긋이 미소 짓는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듯 아름답다. 저 고운 자태가 탄생하는 과정을 사람들 앞에 보이기 수줍어 밤에 몰래 피어나, 태양이 막 떠오르는 햇살 머금고 완숙미를 보이기 위한 듯하다.
나는 그날의 감격을 이렇게 적어 보았다. 청아한 너의 맵시 고고한 기품 성자인 양 홀로 우뚝하네. 청초한 꽃을 그리는 마음 봄부터 긴긴날을 내 너를 위해 온갖 정성 다 바쳤네. 이젠 가을 깊어 너도 긴 휴면에 들 만 한데 뜻 밖에 꽃망울, 아! 나의 기쁨 하늘 닿는다. 숱한 세월 인고(忍苦) 속에 다져진 청초한 새하얀 꽃, 환한 미소에 내 가슴엔 애모 정 가득하네.
보통 꽃은 1주 만에 지는데, 날씨가 쌀쌀한 때문일까? 이 꽃은 2주간을 우리 곁에 머물면서 마지막까지 기쁨을 주고 떠났다. 사랑하던 연인을 잃은 듯 허전하고 애틋하다. 화분 하나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순화시키며, 교무실 환경과 분위기를 전환시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옛 선비들의 방에는 난 그림 한 폭에 난을 찬양하는 글을 담은 족자 하나쯤은 다 걸었다. 내가 난을 키워보니 그 심정을 가히 알 듯하다.
난은 사군자의 하나로 사계절 중 여름을 상징하며, 그 천성이 맑고 깨끗하여 세속을 떠나 심산유곡에서 바람과 이슬 먹고 꽃을 피워, 그 맑은 향기로 사람을 정화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난을 찬양하여 유곡가인독자향(幽谷佳人獨自香(유곡가인독자향)이라 하였으니, 깊은 골짜기에 사람도 없는데 난만이 홀로 향기롭다는 뜻이다. 또 유향청원(幽香淸遠)이라고도 했으니, 심산유곡의 그윽한 향기가 맑게 멀리 속세까지 전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난을 사랑함은 번잡하고 시끄러운 속세를 떠나 난처럼 깨끗하고 고고하게 살고자하는 인간의 이상세계의 추구요 동경이 아닐까?




TAG •
  • ,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목록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6854
서강의 힘
인기글
하이디 이름으로 검색
10-25
1111
6853 답변글
우울 ㅡ 보들레르
인기글
목련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5-02
1109
6852
기억저장소
인기글
로즈윈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1-03
1105
6851
2019년 첫날
인기글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1-01
1104
6850 답변글
목련님^^침묵님^^~
인기글
하이디 이름으로 검색
10-18
1099
6849 답변글
물빛 5월 산행, 가산산성 - 한티재 (5.27/토)
인기글
맥가이버 이름으로 검색
05-24
1097
6848
포석 조명희 문학제 기념 4회 '전국 시낭송 경연대회'
인기글
송창용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9-27
1096
6847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인기글
미소년 이름으로 검색
01-04
1096
6846 답변글
<물빛>이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
인기글
윤정원 이름으로 검색
12-11
1096
6845
나무의 말 ㅡ 이승주
인기글
로즈윈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7-24
1095
6844
제 788회 물빛 정기모임 후기
인기글
로즈윈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4-13
1095
6843 답변글
이진흥 시인의 근작시 2편
인기글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9-28
1095
6842
연꽃이 필 때면(퇴고)
인기글
돌샘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8-10
1094
6841
870회 물빛 정기모임 후기
인기글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2
1093
6840 답변글
물빛 함안나들이 사진 (06.10.14)
인기글
침묵 이름으로 검색
10-16
1088
6839 답변글
셀린 디온(Cel' line Dion)/흰 바지?
인기글
두칠이 이름으로 검색
03-30
1087
6838
의자 (이정록)
인기글
목련 이름으로 검색
07-19
1087
6837 답변글
비슬산, 물빛 산행 (4/22. 토)
인기글
침묵 이름으로 검색
04-21
1085
6836
아침고요의 수목원
인기글
돌샘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8-25
1082
6835 답변글
새 게시판으로 바꿉니다
인기글
카타르시스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03
1081
6834 답변글
돌 3'''나병춘
인기글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1-24
1080
6833
물놀이_한태주 (지리산 소년의 흙피리연주곡)
인기글
온소리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6-08
1077
6832
토종벌 밀납과 벌꿀을 소개 합니다.(1편)
인기글
두칠이 이름으로 검색
10-27
1069
»
난꽃향기 진동하던 날
인기글
돌샘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2-24
1067
6830 답변글
물빛34집 [빨강 아날로지] 출판기념회 후기
인기글
하이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1-29
1065
6829
봄날 피고 진 꽃에 대한 기억 (신동호)
인기글
목련 이름으로 검색
03-02
1065
6828
코뚜레 (신휘)
인기글
목련 이름으로 검색
08-23
1064
6827
640회 모임은 5월 17일 세째 주 화요일에
인기글
로즈윈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4-30
1061
6826
꼬리뼈가 아프다
인기글
카타르시스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2-08
1058
6825
내일은 제 641회 물빛 정기 모임입니다
인기글
로즈윈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5-30
1057
6824 답변글
즐거운 .. .
인기글
목련 이름으로 검색
01-04
1055
6823 답변글
무신 세배까징?^^
인기글
두칠이 이름으로 검색
03-02
1055
6822
한 번 물빛 회원은 영원한 물빛회원
인기글
로즈윈 이름으로 검색
05-09
1054
6821 답변글
물어 봐도 되요?
인기글
두칠이 이름으로 검색
10-26
1053
6820
이기인의 <시인에게 온 편지>
인기글
착한 여자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02
1049
6819 답변글
회원님들 동인지 책값!! 회비! 입금 바랍니다
인기글
김학례 이름으로 검색
11-16
1047
6818
오늘은 제 805회 물빛 정기모임입니다
인기글
로즈윈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2-27
1047
6817
제888회 물빛 정기 시 토론회 후기-T그룹 통화
2 인기글
조르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1-12
1047
6816
인기글
카라 이름으로 검색
03-31
1043
6815 답변글
가을 산에 올라
인기글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3
1042
6814
제 624회 물빛 정기 모임 후기
인기글
하루 이름으로 검색
09-15
1041
6813
물 위의 길 (조용미 시)
인기글
메나리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6-15
1040
6812
한국일보 신춘 동시 당선작
인기글
미소년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1-02
1037
6811
초원의 빛 ㅡ 월리엄 워즈워드
인기글
로즈윈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03
1037
6810 답변글
물빛33집<한 잎의 어둠>출판기념회사진9
인기글
침묵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1-23
1037
6809
오늘은 제819회 물빛 정기 모임 입니다
인기글
하이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7-25
1036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Copyright © mulbit.com All rights reserved.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