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꽃향기 진동하던 날
돌샘 이재영
햇살이 잘 드는 3층 어느 교무실 창가엔 소심난 50여 화분이 나란히 서 있다. 이 화분은 그 학교 교사들이 집에 있는 화분을 갖다놓기도 하고 사다 놓기도 한 것이다. 올봄에 새로 부임한 생물교사가 난 화분 3개를 갖다놓은 것이 모두 꽃이 활짝 피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난 키우는 법을 배우고자 갖다놓은 화분들이다.
김 교사는 난을 기르는 법은 물 주기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난은 물을 많이 주어서 죽으며, 물을 적게 주면 죽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죽지 않을 정도로 물을 주어야 살며 꽃도 잘 핀다고 한다. 교무실에 있는 난들이 사 올 때는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진 뒤에는 다시 꽃이 피는 것을 보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김 교사가 온 후로는 교무실의 난은 모두 꽃이 피었다. 집에 있는 난들이 시들면 교사들은 모두 교무실로 갖고 왔다. 심하게 망가진 것은 분갈이를 하고, 주사를 놓기도 하며, 웬만한 것은 난비료를 주고, 물은 하절기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합동으로 주었다.
모두 이듬해 봄에는 자기 난들이 꽃을 피우리란 희망을 안고 자식처럼 정성을 쏟아 길렀다. 서너 달 후 거의 망가져가던 난들도 생기를 띠더니 새 촉이 돋아났다. 이듬해 봄이 되니 하나 둘 꽃이 피기 시작하여, 연속해서 가을까지 꽃이 핀다. 온 교무실이 향기로 가득하다. 모두 지친 피로를 말끔히 잊고, 환한 미소로 종일 기분이 좋아 한다. 꽃이 핀 화분 주인들은 자신도 난을 꽃피울 수 있다는 만족감에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난은 다 피었는데 나의 난은 아무 소식이 없다. 실망이 컸다. 난 담당교사와 함께 난집에 가서 모양 좋고 꽃이 잘 핀 것으로 특별히 골라 온 것인데 내게 실망을 주다니 기대했던 희망이 일시에 무너졌다. 모두들 과학 선생 것이 저모양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핀잔을 준다. 그러나 아무런 대꾸할 말이 없어 마음은 한없이 괴로웠다.
가을이 깊어 이젠 휴면기에 들었나 싶어 포기했는데 뜻밖에 꽃대가 올라왔다. 생기 있는 잎새 연약한 듯 단단한 사이로 보랏빛 살진 줄기 두 대가 힘차게 올라왔다. 내 희망의 싹이 튼 것이다. 대기만성이라고 하더니 역시 예술은 늦게 이루어지나 보다. 줄기가 나오기 무섭게 이젠 급한 듯 쑥쑥 자라더니 꽃망울을 조랑조랑 터트린다.
단풍잎도 거의 진 만추, 쌀쌀해진 날씨에 꽃망울이 하나 둘 터지기 시작하더니 멈추지 않고 핀다. 그러나 꽃이 다 피려면 며칠 더 걸릴 것 같다. 이튿날 상쾌한 아침 출근길 걸음이 바쁘다. 난을 보기 위해서다. 교무실 문을 들어서니, 햇볕이 창살에 눈 부신다. 밤사이 난이 활짝 피어 떠오르는 햇살 머금고 방긋이 미소 짓는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듯 아름답다. 저 고운 자태가 탄생하는 과정을 사람들 앞에 보이기 수줍어 밤에 몰래 피어나, 태양이 막 떠오르는 햇살 머금고 완숙미를 보이기 위한 듯하다.
나는 그날의 감격을 이렇게 적어 보았다. 청아한 너의 맵시 고고한 기품 성자인 양 홀로 우뚝하네. 청초한 꽃을 그리는 마음 봄부터 긴긴날을 내 너를 위해 온갖 정성 다 바쳤네. 이젠 가을 깊어 너도 긴 휴면에 들 만 한데 뜻 밖에 꽃망울, 아! 나의 기쁨 하늘 닿는다. 숱한 세월 인고(忍苦) 속에 다져진 청초한 새하얀 꽃, 환한 미소에 내 가슴엔 애모 정 가득하네.
보통 꽃은 1주 만에 지는데, 날씨가 쌀쌀한 때문일까? 이 꽃은 2주간을 우리 곁에 머물면서 마지막까지 기쁨을 주고 떠났다. 사랑하던 연인을 잃은 듯 허전하고 애틋하다. 화분 하나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순화시키며, 교무실 환경과 분위기를 전환시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옛 선비들의 방에는 난 그림 한 폭에 난을 찬양하는 글을 담은 족자 하나쯤은 다 걸었다. 내가 난을 키워보니 그 심정을 가히 알 듯하다.
난은 사군자의 하나로 사계절 중 여름을 상징하며, 그 천성이 맑고 깨끗하여 세속을 떠나 심산유곡에서 바람과 이슬 먹고 꽃을 피워, 그 맑은 향기로 사람을 정화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난을 찬양하여 유곡가인독자향(幽谷佳人獨自香(유곡가인독자향)이라 하였으니, 깊은 골짜기에 사람도 없는데 난만이 홀로 향기롭다는 뜻이다. 또 유향청원(幽香淸遠)이라고도 했으니, 심산유곡의 그윽한 향기가 맑게 멀리 속세까지 전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난을 사랑함은 번잡하고 시끄러운 속세를 떠나 난처럼 깨끗하고 고고하게 살고자하는 인간의 이상세계의 추구요 동경이 아닐까?